노을 치마와 하도롱빛 소식 / 송복련

 

 

마음을 담아 보내기 좋은 그릇으로 편지만 한 게 있을까. 아름다운 편지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노을빛 치마에 적어 보낸 편지와 하도롱빛 봉투의 우련한 빛이 감성을 건드린다. 노을 치마가 눈앞에 한동안 너울거렸다. 다산은 왜 편지에다 노을 치마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산바람 불어와 가랑비 뿌리는데/ 서로가 가기 싫어 망설이는 듯하구나”

 

이 시를 남기고 강진으로 떠난 남편과 이별한 지 7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눈서리 찬 기운에 수심만 더욱 깊어지네/ 등불 아래 한 많은 여인이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그대와 이별한지 7년/ 서로 만날 날이 아득하기만 하구나”

 

​ 이별 뒤에 그리움을 담은 시를 지어 시집올 때 입었던 빛바랜 다홍치마와 함께 남편에게 보낸 부인 홍 씨의 편지다. 병든 아내가 보내온 다홍치마는 이제 해 질 무렵의 노을빛으로 바랬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 생이별을 했으니 서로 걱정은 얼마나 되었으며 보고 싶은 마음은 병이 되었을 터. 아비 없이 혼자 자식들을 돌보는 아내를 위해 다산은 첩帖을 만들기로 했다. 멀리서나마 자식들에게 가르침이 되는 글을 적어 보내려고 그 치마폭을 마름질해서 작은 책자로 묶었다. 그것이 하피첩霞帔帖이다.

 

30년 전 혼례날에 신부의 다홍치마를 떠올리며 다섯 폭 비단치마를 뜯어 만드는 지아비의 애틋한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부부의 마음이 모아진 선물이다. 두 아들에게는 선비의 덕목으로 책읽기를 권했고 어려움을 견뎌낸 두보의 시를 익히도록 당부했다. 어린 딸은 어느덧 혼담이 오가는 나이가 되었으나 딸을 보지 못하는 마음은 오죽할까. 다홍치마폭에 화조도를 그려 부친다. 흰 매화 꽃가지에는 새 두 마리가 다정하게 한 방향을 바라보며 정답다. 부부가 평생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라는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지는 선물이다. 대학자이지만 집에서는 다정다감한 지아비요 아비였다. 꽃다운 나이는 어느덧 황혼으로 접어들었으니 만감이 오갔으리라. 신부의 혼례복인 붉은 치마는 이제 노을빛으로 빛이 바랬다. 노을 치마는 노년의 부부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였다.

 

내 서가에는 오래도록 귀퉁이에서 잠자는 책이 한 권 있다. 빛바랜 <이상 전집 제3권 수필집>을 보니 이제 골동품 수준이다. 버려지는 책 더미에서 주운 사십 년도 전의 책을 차마 버리지 못한 채 나와 함께 나이가 드는 중이다. 오늘은 책 기담을 읽다가 이 책이 떠올랐다. 누렇게 바래고 표지가 누덕누덕한 책을 펼쳐 드니 묵은 냄새가 훅 끼쳤다. 단기 사천이백팔십구 년 초판 인쇄 정가 900원이다. 속지에 귀한 사진이 두 장 실렸다. 하나는 이상의 중학교 졸업 사진이고 또 하나는 제비나방 개업 기념 때 촬영한 가족사진으로 흐릿하다. 목차를 넘기니 첫 수필 <산촌 여정>이 세로글씨로 인쇄되었다. '성천 여행 중의 몇 절'이라는 부제가 붙은 글은 국한문 혼용체다. 흐릿한 눈으로 더디 읽어 내려가니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듯 박히는 맛이 있다.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20여 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안 오고 우신부는 이따금 <하도롱>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나는 첫 문단에 그만 붙들렸다. 객줏집에서 석유 등잔을 켜놓고 소년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글들은 나중에 볼 일이다. ‘MJB와 <하도롱>빛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편지 형식의 이 수필은 요양차 친구의 고향인 평안북도 성천에 갔을 때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이상은 커피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몇 개의 다방을 열게 되는데 다방 '제비'를 모르는 이는 없을 듯하다. 얼마 뒤 폐업하고 '쯔루(학)' '무기', '69' 등을 잇달아 열지만, 그 역시 얼마 가지 못했던 것 같다. 여기서 MJB는 미국산 커피 이름으로 설립자의 머리글자를 따왔다고 한다. 이상은 금홍과 제비 다방을 열고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갈 곳 없는 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던 다방에서 커피를 즐겨 마시며 문학적 담론을 나누었던 터라 도시적 이미지를 풍긴다. 반대로 성천은 함경북도의 한적한 시골로 우체부마저 뜸하게 소식을 전한다. 하도롱빛은 어린 시절 보았던 누런 편지 봉투를 말하는 모양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누르스름하고 질긴 종이로 포장지나 봉투를 만드는 데에 쓴다.‘고 되어 있다. 하도롱빛 소식에 하롱하롱 꽃잎 지는 풍경이 떠오르고 창호지에 달빛이 어룽거리거나 여명이 어리듯 아름다운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한참 멀리 나가긴 했지만 오래된 이미지를 나타내는 빛깔로 아름답고 은은하다. 빛이 옅어지고 흐릿해지면 비록 색감은 떨어지나 켜켜이 쌓인 사연들이 스며들 듯이 예스러워서 좋았다. 누렇게 바랜 이상의 수필집은 이제 하도롱빛으로 불을 밝힌다. 글은 더 나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오늘 나는 편지와 관련된 두 단어에서 아름다운 빛깔과 만났다. 노을빛 치마와 하롱빛 소식은 그리움의 빛깔이다. 멀어서 아득해진 곳의 소식들이 아련히 피어오르는 그런 빛깔은 옛날을 그리는 내 마음과 같아서 훈훈해지는 하루다.

 

* 하피첩(霞帔帖): 노을 하(霞), 치마 피(帔), 문서 첩(帖))으로 노을빛 치마로 만든 소책자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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