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중략)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1945∼ )
옛날 시의 이론을 다룬 책에 보면 ‘기도로서의 시’가 따로 있었다. 복을 내려달라고 신에게 고하는 것을 ‘기’라고 하고, 복을 구하기 위해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이 두 말을 붙이면 ‘기도’가 된다. 낮고 유한한 사람에게서 나오지만 높고 귀하신 신에게 닿기를 바라는 염원이 기도에 담겨 있다. 우리가 힘에 부칠 때 도와달라는 그 간절한 염원 말이다. 특정 종교를 넘어 염원의 말 그 자체가 기도라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또한 기도인 셈이다.
이 유명한 작품에서의 물은 우리가 마시는 그 물이 아니고, 불은 우리의 산을 태우는 그 불이 아니다. 예전부터 많은 이가 해석하기로 시에서의 물은 생명과 희망을 의미하고 불은 부정적인 여러 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요즘은 이 시의 물과 불을 바로 그 물과 불, 그러니까 사전적이고 기초적인 의미로 읽게 된다. 곳곳에 산불이 일어 꺼지지 않기 때문이다. 불티가 날려 산불이 번진다는 말을 들을 때면 산이 타듯 애가 탄다. 불이, 이 시의 물로 꺼지기를 바라게 된다. ‘우리가 물이 되어’ 구절을 여러 번 읊조리게 된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기도가 된다. 이번 봄에는 분명 그 기도가 필요하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