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누이/ 김덕임
나이테가 선명한 그루터기에 새순이 우북하다. 아직 달큼한 나무 향이 나이테 고랑에 진하게 흐른다. 새순은 마치 영석이 움누이의 파마머리처럼 윤기가 난다. 그녀는 파마머리에 아주까리기름을 즐겨 발랐다. 반지르르한 머리태는 항상 동네 아줌마들의 관심을 끌었다.
둥그런 그루터기 위의 연둣빛 새 생명이 산책길의 발목을 붙든다. 지난봄에 베어낸 뒷산 참나무 그루터기들이, 혼비백산했던 정령을 여름 내내 불러들이고 있다. 그루터기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울창한 참나무 숲을 꿈꾸기 시작하는 것 같다. 사람이 제아무리 수종 갱신을 한다고 베어냈지만, 억척스런 뿌리가 받치고 있는 그루터기가 아닌가. 그 끈기와 뚝심을 누구라서 이겨낼 재간이 있을까? 새로운 나무 묘목을 심기도 전에, 그루터기가 먼저 참나무 숲을 만들 기세다.
잘려 나간 참나무 둥치는 어느 제재소에서 생을 마쳤을까? 그루터기는 생이별의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고 있다. 그리고 푸른 세상을 향해서 까치발을 내딛고 있다. 여린 것이 질긴 것인가. 질긴 것은 본디 여린 것인가? 소생하는 새움 앞에서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처럼 갈등하게 된다.
우람하던 나무 둥치는 잘려 나갔지만, 참나무의 생명력은 질기다. 새순들은 접붙인 묘목처럼 짱짱하다. 스크럼을 짜고 우우 구호를 외치며 올라온다. 휑하던 산판이 마치 신병들의 훈련장 같다. 이대로 잘 자라면 처음의 나무둥치 몫을 넉넉히 감당할 것 같다. 새순들은 이번 여름만 지나면, 아마 사람 키를 훌쩍 넘을 것 같다. 참나무를 베어낸 후에 민둥산 같던 산이 불과 넉 달 만에 다시 푸르다. 이제는 누구도 침범할 틈을 주지 않을 것 같다. 새순들의 행렬에 용사 같은 결기가 보인다.
이 아이들이 내후년쯤에는 원래 참나무가 하던 일을 깔축없이 해낼 것이다. 봄이면 연초록 이파리들은 무수히 피워낼 것이고, 여름에는 멍석 같은 그늘을 만들어서 다람쥐와 등산객에게 쉼터를 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가을에는 우박처럼 쏟아내는 도토리에 다람쥐들은 환호할 것이다. 염치없이 도토리 줍는 아줌마들도 줄을 이을 것이고.
어렸을 때 고향 마을 친구 영석이에게는 엄마보다 더 자상한 누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누이는 시집간 지 5년 만에, 음주 운전자의 질주로 인해서 세상을 떠났다. 네 살 아들과 서른 중반의 남편을 남겨놓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신혼의 단꿈이 퇴색하기도 전에 웃음꽃이 만발하던 그 가정은 한순간에 천상에서 무저갱 같은 지옥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가 없다. 히말라야의 여러 고봉을 오르는 등반길이라고 할까? 반석 같은 길인가 하면, 어느 순간에 살얼음판이 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바스 속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척하지만, 가장 연약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매 순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아간다. 교만하기 그지없다.
영석이의 매부는 엄마가 하늘나라 간 줄도 모르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팍팍한 삶을 몇 년씩 이어갔다. 딱한 부자(父子)에게 내려준 신의 가호였을까? 영석이의 매부는 천사 같은 여자를 만나서 재혼하게 되었다. 그녀는 참나무 그루터기에 접붙인 새 묘목 같은 여자였다. 그녀의 온화한 얼굴은 봄비에 씻긴 참나무 이파리 같았다. 그리고 덧니를 드러내며 웃을 때면 그녀의 아우라 같은 푸르른 나무 향기가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영석이에게도 친누이처럼 살가웠다. 어느 순간부터 '움'에서 '움' 자를 떼어내고 '누이'가 되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린아이가 계모와 살게 되었다며 내심 안쓰러워했다. 그러나 영석이의 움누이는 어린 조카를 친자식처럼 살뜰히 보살폈다. 젊은 누이는 그 아이 하나만 자라면 이다음에 외로울 것이라며, 남매를 낳아서 보탰다. 그리고 삼 남매를 콩 한 쪽도 나눠 먹이며 차별 없는 모정으로 보듬어 길렀다. 그녀는 큰아들이 어릴 때, 눈물을 닦아주다가 부둥켜안고 함께 울기도 했고, 사춘기 시절의 울퉁불퉁한 성정도 낫낫하게 다리미질해 주었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큰아들의 친엄마였다. 아이들은 씨알이 쪽 고른 가을무처럼 잘 성장했다. 지켜보던 동네 어른들도 전처의 아들을 티 없이 잘 길러낸 그녀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세상의 호의는 언젠가는 변심한 애인처럼 떠나버릴 수 있다. 그녀는 호의뿐만 아니라 손가락질과 숙덕거림도 시나브로 그리될 것이라 믿었다. 그저 마음을 다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변함없이 뒷바라지했다. 이런저런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정성에 하늘도 사람도 감동했을 것이다.
쏟아지는 햇살에 연초록 새순들이 생기발랄하다. 산들바람이 개구쟁이처럼 이들의 틈새를 휘젓는다. 낭창한 새순들은 허리를 꺾으며 자지러진다. 그 솜사탕 같은 웃음소리에 산책길이 온통 달콤하다. 아내와 세 자녀의 엄마 몫을 다 해낸 영석이의 움누이. 참나무의 새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