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숭고 / 김종희
콘크리트에 닿은 비가 부러지고 있습니다. 부러진 비는 물이 됩니다. 그러나 물이 된 비는 누워도 서 있습니다. 비로 서야할 물... 등뼈를 꼿꼿이 세운 비는 곧 죽어도 서서 걸어갑니다. 거친 균열을 일으키는 생생한 감각, 비의 순례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야 할 곳을 향해 머뭇거리지 않는 비의 길을 보면서 어떤 숭고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비였다가 물이 된 사람, 하늘을 보며 누워도 땅을 지고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한여름 땡볕 속에 고인 찬물 냄새로 스며든 이름입니다. 오래된 우물물을 첨벙첨벙 길어 올린 두레박엔 아버지의 그림자가 물무늬로 어른거립니다.
마당 깊숙이 수도시설이 들어와도 아버지의 우물은 언제나 마당 밖에 있었습니다. 우물가 귀퉁이가 달아난 돌확에는 불었다가 마르기를 반복하는 다이알 비누가 햇빛에 타고 있었습니다. 쩍쩍 갈라진 비누의 틈으로 많은 것들이 기어 나왔습니다.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뚝뚝 부러지는 뒷산 소나무 가지도, 사람의 말처럼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도 갈라진 비누로부터 쪼개진 것들입니다
아버지의 손바닥은 갈라진 비누였습니다. 갈라진 손바닥으로 문질러 나온 갈라진 거품으로 아버지는 면도를 했습니다. 아버지의 수염은 언제나 서 있었습니다. 바람에 서걱이는 마른 옥수수대궁 소리가 났습니다. 비눗물에 닿고서야 수염은 힘을 뺐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힘 빼는 일이란 걸... 거친 수염이 잘려나간 자리에 고인 사분냄새를 보며 알았습니다.
기 펴고 살아라. 기억으로 저장되기 훨씬 전부터 아버지는 내가 눈을 뜨던 말든 팔다리를 쭉쭉 당겨 늘렸습니다. 빨랫줄에 걸린 기 빠진 교복은 군용담요 다리미판에 눕혀 등판부터 소매 끝까지 빳빳하게 세워주었지요. 주름은 채우고 구겨진 건 펴고 날 세운 칼라를 두르고 빳빳하게 기를 세웠습니다.
내가 기를 펴고 걷는 동안, 기 빠진 아버지 사라진 육신은 마른버짐처럼 희미해져 마침내 기억에서조차 밀려났습니다. 빈 가슴이 땅에 닿도록 구부려도 맨화투 기리하던 손맛으로 기를 세우던 당신이 떠난 묵은 자리... 드라이어 바람에 뒹구는 기 빠진 머리카락이 기를 세우고 있습니다.
오래 투병하던 아내의 부고를 알리는 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달리 해줄 말이 없어 그의 말이 바닥에 닿을 때까지 듣고만 있었습니다. 고독의 냄새가 우울의 냄새는 아니라며 일어서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토네이도처럼 어떤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생동지절에 생사의 처지를 달리한 그녀의 이름 석자가 감나무 가지 끝에 끈끈하게 매달립니다.
나는 비 소리를 들으며 비의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뜨거운 물 한 잔을 마시며 물이 지나간 길에 일어서는 감각을 그려보는 중입니다. 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비. 비의 죽음이 물로 흐르고 있습니다. 온통 죽음의 아우성 속 나는 살아있는 사람. 살아있는 사람의 몸 깊은 곳으로 따뜻한 물이 밀어 넣습니다. 물의 순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아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날마다 순례의 길을 나서겠지요.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란 말이 수문으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소용돌이칩니다. 활어처럼 퍼득이는 심장으로 비의 뒷 풍경을 봅니다. 때로 벼리된 날보다 뭉텅한 것이 예리한 법이라며 틈이 된 비, 낮은 파문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