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박음질하며 / 최봉숙
인연의 붉은 실은 얄궂게도 산골 청년과 도시 처녀를 하나로 묶었다. 신혼부부가 된 우리는 우줄우줄한 산이 고집스레 박혀있는 산촌에서 신접살이를 시작했다. 도시에서 수돗물을 마시며 살던 도시내기가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고 외양간의 워낭소리에 잠이 깼다. 깊은 밤, 대숲을 밟고 달려가는 바람 소리에 풋잠이 깨면 머리 위에서는 천장을 무너뜨리기라도 할 듯 생쥐들이 난장을 치고 있었다. 세상모르고 단잠에 든 신랑의 무심함이 어찌나 서운하든지.
친구와 마주 앉아 이장희의 ‘그건 너’를 들으며 느긋하게 마시던 커피가 그리웠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며 킬킬대고도 싶었다. 타향에서 살다보면 고향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든가. 하다못해 산마을을 찾아드는 외지차량에도 울컥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대전 0000 라고 쓰인 번호판 때문이었으리라.
끼니때가 다가오면 쇳내 나는 가마솥을 부시고 밥을 안쳤다.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지필 때마다 솔가지 타는 연기를 핑계 삼아 눈물을 질금거리면서 그렇게 도시내기는 산촌에 길들어갔다. 허여멀건 며느리를 폭양에 내놓기가 안쓰러웠을까.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모내기철은 물론이고 계절이 바뀌고 새로운 계절이 다가와도 시어른들은 들녘에 발걸음도 못하게 했다.
한낮의 산촌에 후터분한 침묵이 내려앉으면 동네 개들의 컹컹대는 소리만이 무거운 적요를 흔들어 깨우곤 했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시간은 남아도는데 할 일이 없었다. 아니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무료하고 답답한 날들이 오고 또 갔다.
재봉틀을 벗 삼아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처음 만져 보는 기계는 결코 녹녹치 않았다. 재봉사가 서툰 걸 아는지 녀석은 하라는 바느질대신 죄 없는 손가락을 박아댔다. 볼품없이 가늘고 긴 몸에 가진 거라고는 겨우 귀하나 뿐이었지만 성깔 하나만은 제법 매웠다. 노루발 앞에서 잠시만 머뭇거려도 손가락 끝에 핏방울이 매달렸다.
하지만 손끝이 여문 앞집 명호엄마가 재봉틀 앞에 앉으면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능숙하게 바느질을 했다. 비록 쓸모없는 헌옷일망정 그녀가 마름한 천은 어이딸이 두부 앗듯 때깔 좋고 쓸 만한 것으로 다시 태어났다. 붉은 핏방울이 검지에 맺혔던 연유는 어설픈 솜씨 때문이었으리라. 옷감을 마르고 이어붙이며 심상한 시간을 보내던 시절, 박았다 뜯길 여러 번 하다보면 멀쩡하던 옷감은 간데없고 여기저기 바늘자국이 나고 찢어진 천 쪼가리들만 남기 마련이다. 그렇게 못쓰게 된 헝겊나부랭이를 아궁이 속에 던져 넣으면서 시집살이의 고단함까지 함께 사르곤 했다.
해가 가고 달이 바뀌면서 살림에도 익숙해졌다. 손이 많이 가던 아이들도 자라서 생활에 여유를 갖게 되자 남아도는 시간에 무언가 만들고 싶어졌다. 문득 재봉틀이 생각났다. 고달팠던 시절, 가까운 친구 같이 의지 했건만 일상이 바빠지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녀석. 하루에도 몇 번씩 뜬마음을 붙잡아 앉히며 소마소마한 시간을 박음질하던 옛일이 오래된 무성영화처럼 떠올랐다.
쓰임새가 없어진, 그러나 버릴 수는 없었던 재봉틀은 창고 한구석에 처박힌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녀석을 꺼내 묵은 먼지를 털어냈다. 기름을 친 후 조심스레 발판을 굴러보니 생각보다 부드럽게 돌아갔다. 북 실을 넣고 바늘에 실을 꿰었다. 노루발 밑에 헝겊을 밀어 넣은 후 발판을 구르자 바로 어제도 일한 것처럼 어색함도 없이 박음질을 시작했다. 여직도 그렇게 손이 굼뜨냐고 책망이라도 하는 걸까. 멈칫거리는 검지에 구멍을 뚫는 것도 여전했다.
서툰 솜씨로 베게나 가방 등 소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자신감이 생기고 욕심도 커졌다. 이불홑청을 만들고 커튼도 만들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솜씨가 엄청 좋아진 것은 아니다. 늦게 배운 도둑,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내 손으로 만든 것이 하나 둘 늘어가는 재미에 창밖이 희붐하게 밝아오는 것조차 모르기 일쑤였다. 끼니때를 놓치는 일이 다반사였고 먼지와 실밥이 방안을 날아다녔지만 그 또한 개의치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한밤중에 재봉틀 소리를 들어야 해? 이제 조용히 잠 좀 자자.”
남편은 볼멘소리를 했지만 아이들은 바느질하는 엄마를 좋아했다.
고물이 된 재봉틀은 이미 내처진지 오래다. 적막한 밤, 겨울바람이 사납게 전깃줄을 훑고 지나갔다. 재깔대던 아이들조차 곁에 없는 요즘, 밤새워 행복을 짓던 그 시절이 가끔씩 그리워지기도 한다. 오래 전, 대숲을 건너가던 바람소리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