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니 / 박갑순

 

 

아끼던 차를 폐차시키고 중고를 구입한 적이 있다. 필리핀에서 낡은 차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폐차한 내 차가 혹 그곳에서 그들의 손에 의해 새롭게 탄생하여 달리고 있지 않을까 싶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관광버스는 종일 에어컨을 틀었다. 한낮에만 잠깐 틀어도 될 날씨인데도 운전사는 에어컨에 무감각한 건지 서비스 정신이 없는 건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에어컨을 끄든가, 좀 약하게 하라고 주문하니 그런 조절이 불가하다고 했다. 켜든지 끄든지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단다. 우리나라에서는 진작 폐차장으로 갔을 법한 차 같았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출고된 지 20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버스로도 아슬아슬하게 좁은 길을 잘도 달렸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비명횡사할까 두려워 있는 힘을 다해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운전기사는 아주 태연했다.

시가지 도로 한쪽엔 우리나라의 대기 중인 택시처럼 줄지어 기다리는 지푸니들이 있었다. 사람들을 싣고 달리는 도색이 화려한 지푸니의 모습이 경이로웠다. 타고 내리는 일은 문도 없는 차 뒤를 통해서였다.

필리핀 서민들의 교통수단인 지푸니에서 사람 냄새가 느껴졌다. 지푸니는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에서 폐차 상태에 있는 차들을 들여와서 모두 망치로 두드리고 펴서 개조하여 만든 수제 차란다. 유리창도 없는 비좁은 공간에 의자만 길게 마주 놓여 있다. 그곳에서 쭈그리고 앉아 가다 내리면 코가 시커멓게 되는 일은 다반사란다. 그나마 지푸니라도 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거라니. 좀 힘든 현실을 탓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지푸니와 일반 차량이 얽히고설킨 도로는 아찔했지만, 누구도 경적을 울리지 않는 모습이 신선했다.

거리에 나와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느긋했다. 뛰는 사람을 찾아보려 애써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게으르다고 말하나 그들은 게으른 게 아니라 느린 것이란다.

차량 밖에서 느리게 걷는 사람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그들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답해주었다.

지푸니는 항상 같은 시각에 출발하는데 우리나라 옛날 차장 같은 조수가 있었다. 우리의 차장은 버스 요금을 받는 게 주목적이었지만, 지푸니의 조수는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싣고 내려주기 위해서 필요하단다. 비가 오나, 거센 태풍이 지나가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지푸니는 거리를 달린단다. 가끔 버스회사와 운전사들 간의 갈등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묶어버리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참 순수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조수는 승객들의 짐을 싣느라 온몸이 젖는 것엔 아랑곳없이 출발시간에 맞추려 안간힘을 쓴다. 옥수수, 사요테, 고구마, 토마토, 카사바, 자프릇, 바나나 등 온갖 채소와 과일들을 싣느라 땀범벅이 된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다.

지푸니 지붕 위까지 빼곡히 짐을 싣고 달리는 것을 보면서 어릴 적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중학교에 다닐 때. 등하굣길에 우연히 경운기나 소달구지를 만나면 죽기 살기로 달려가서 얻어 탔다. 주인은 위험하다고, 또한 짐이 많이 실려 있어 자리가 없다고 말렸으나 우리들은 안간힘으로 주인 몰래 매달렸다. 검정 운동화가 자갈에 쓸려 밑창이 닳아도, 먼지가 눈으로 콧구멍으로 들어와도 손을 놓지 않았다. 학교에 빨리 갈 수 있는 점도 있지만, 그것을 타는 맛이 좋았다. 그 시절 시골에선 지푸니 같은 차도 구경하기 힘들었다.

어느 날 마을 언덕길에 택시 한 대가 들어왔다. 동네 꼬마들은 모두 그곳으로 집결했다. 잠깐 멈춘 차를 만져보기도 하고, 차 유리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호기심이 흙먼지처럼 일었다. 그때 갑자기 택시가 후진을 했다. 깜짝 놀란 우리들은 그대로 뒷걸음질을 쳤고 나는 그만 똥통에 빠지고 말았다. 대소변을 모아 논밭에 거름으로 사용하던 때라 집집마다 변을 삭이기 위한 큰 항아리를 묻고 밖으로 나온 똥통에 나무판자 뚜껑으로 덮어 놓았었다. 그 힘없는 판자를 밟는 바람에 그만 그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악취와 벌레로 전신을 뒤집어쓴 그때의 악몽은 오래전 휘발되어 잊었는데 필리핀에서 다시 떠오르다니.

지푸니를 타려고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을 보며 혼자 웃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