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에 붓을 치다 / 신서영
동면에 든 주남저수지는 멀리서 바라보면 수묵화의 텅 빈 여백이다. 비어있지만 그 속에 끊임없이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수묵화는 시를 품은 그림이라고 한다. 먹은 화려한 컬러가 가지지 못한 고유한 내면의 은근한 색을 지닌다. 칠하지 않은 흰색의 여백과 먹의 농담에 따라 바짝 마른 색과 축축한 색이 자연의 오묘한 깊이를 드러낸다. 자연의 조화는 어느 것 하나라도 그 자리에 있어 자연의 일부가 된다. 겨울 저수지는 저수지 밖의 온갖 사물이 저수지 수면 위에다 제 몸을 비추면 그림이 되고 시가 된다. 하늘을 품은 저수지가 맑고 깊다. 저수지는 새들의 발자국으로 숨을 쉰다.
혹한을 피해 남쪽으로 날아온 철새들의 지저귐에 저수지는 순식간에 활기에 찬다. 꽁무니를 치켜들고 자맥질하던 가창오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물고기를 낚아채곤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큰 고니는 선비처름 음전한 걸음걸이로 사방을 압도한다. 청둥오리 한 쌍이 갈대숲에서 깃털을 다듬으며 사랑을 나누고 있다. 겨울 저수지는 또 다른 생명의 삶이 되고 은신처가 된다.
물속에 몸을 담근 버들은 가지마다 새를 앉히고 솟대가 되었다. 여기 저기 솟은 솟대는 마치 저수지도 간절하게 비손을 올려야 할 소원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솟대 신앙은 물을 상징하는 물새를 장대 위에 세우고 마을이나 집안의 화복을 빌었다. 인간의 희구하는 행운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소원을 이루고자 솟대를 세웠다.
거실에는 앙증맞은 청동 솟대 한 쌍과 주물로 만든 솟대 세 마리가 있다. 딱히 마음에 두고 있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솟대에 자주 눈길을 보내며 내 소원을 해결해 달라며 마음으로 은근히 빌기도 한다. 그런데 솟대의 생김새를 보면 소원은 고사하고 웃음이 절로 나온다. 청동 솟대는 기다란 자리에 자기 몸통이나 비슷한 크기의 물고기를 입에 물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지금 막 물속에서 낚아챈 먹이에 정신이 팔려 아예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주물 솟대는 참하게 생긴 오리를 긴 철사 끝에 앉혔다. 솟대의 품위가 당당하다. 그런데 어둑한 밤이 되면 그놈의 그림자가 나를 가지고 논다. 불빛에 따라 목이 길고 꽁지가 축 늘어진 가마우지가 되었다가 입이 긴 물떼새가 되기도 한다. 그 그림자에 빠져들고 싶은 날은 전등을 끄고 촛불을 켠다. 때로는 철사의 미세한 흔들림에 꽁지를 까딱거리는 것을 보면 비상을 꿈꾸며 고향 시베리아를 그리워하고 있는 듯 애틋해 보이기도 한다.
양의 기운이 음의 기운으로 서서히 몸을 바꾸는 저녁나절이 되면, 노을은 붉다 못해 핏빛으로 저수지를 흥건하게 적신다. 원숙미가 물씬 풍기는 노을빛에 저수지의 여백은 또 다른 물감으로 한 폭의 추상화를 그린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저수지 가장자리 물속에 몸을 담근 연이다. 바짝 마른 연 줄기들이 세찬 바람에 꺾이고 휘어져 얼기설기 엉켜있다. 몸이 부딪치기도 하고, 얼싸안기도 하다 무참히 꺾이고 바스러져 물속에서 썩어가고 있다. 언뜻 보면 그 모습이 우리네 삶 같아 자신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노을빛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꺽인 연 줄기의 모서리들이 각이 되고 크고 작은 각들이 모여 여러 가지 도형이 되었다. 강렬한 노을의 역광을 받은 도형들이 수면 위의 그림자와 겹쳐지면서 기하학적인 아름다운 문양이 된다. 연밥은 선혈이 낭자한 물너울에 줄기가 휘어져 머리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그 모양이 음표를 그려 놓은 듯하다. 멀리서 보면 청둥오리들이 세모를 물고 물속에 들어갔다가 네모를 물고 나온다. 논병아리는 음표를 물고 자맥질을 한다. 도형과 음악공부에 열중하는 철새를 보며 노을이 지기 전에 마음으로 한 폭의 추상화를 스케치한다.
수천 마디의 언어들이 잿빛 저수지에서 종일 모이고 흩어진다. 한 무리의 가창오리와 청둥오리가 수면 위를 박차고 날아오른다. 하늘로 솟구치는 비상을 본다. 점점이 이어져 빗금이 된 날렵한 언어들이 하늘을 난다. 그 행간에서 종횡무진으로 활기찬 날갯짓과 저수지의 깊고 아늑한 침묵의 의미를 읽는다.
기억 저편으로 멀리 숨어버린 문장들을 찾아 나선 적도 있다. 주남저수지와 우포늪을 오가는 철새들이 쉬어가는 곳이 고향집 앞산이고 들판이었다. 나지막한 앞동산은 철새들의 아지트였다. 새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방안에까지 들릴 때면 희한하게도 매서운 겨울이 철새와 함께 찾아왔다. 장작불을 지피던 아랫목에 발을 밀어 넣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다. 놋화로에 둘러 앉아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가 환청으로 들리는 날도 있다. 그 소리를 마음으로 재생하려고 멀리 귀를 기울인다.
지친 일상을 내려놓고 잠시 몸과 마음의 느긋한 여유가 생각날 때는 겨울 저수지의 여백을 찾아 나선다. 그곳에 가면 흔들림이 가라앉는 것 같다. 온갖 생명들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소리가 어느덧 하나의 초점으로 응집된다. 저수지는 하늘이 되고 하늘은 저수지가 된다. 갈길 재우치던 바람도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갈대의 손을 빌려 허공에 커다랗게 일필휘지를 시도한다. 겨울 저수지에서 어느새 생명의 환희를 본다.
화중유시畵中有時라던가. 겨울 저수지에서보는 한 폭 그림 속에 시원始原의 여백이 있다. 여백은 여운餘韻이다. 나는 그 여백에 마음으로 붓을 휘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