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어떤 빛깔에 젖어 있을까. 자연의 색을 찾아 떠난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쪽빛 바다를 감고 골짜기를 굽이돌아 산 기스락에 도착하지 어느새 하늘이 노을빛이다. 흙빛이며, 먹빛이며 밤 이슥하도록 나누는 이야기에 별빛이 반짝 내려앉는다.
별빛이 사그라진 희붐한 새벽부터 친구의 걸음이 바빠진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자 밤새 물을 빨아올린 쪽의 줄기에 자줏빛이 촉촉이 올랐다. 연보라꽃을 한두 송이 물고 있는 쪽은 아침이슬까지 머금어 색깔이 절정에 이르렀다. 햇살이 꽃눈을 틔우는 봄부터 풀빛 바람이 산모롱이를 에도는 여름까지 오롯이 쪽에 담겼다. 친구가 두 계절을 베어 내게 한 아름 안긴다. 풋풋한 풀 냄새를 맡자 온몸에 쪽빛이 번지는 듯 마음도 푸르러진다.
항아리에 쪽을 반쯤 채운다. 물을 붓고 그 위를 돌로 지그시 누르면 이제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쪽은 항아리 속에서 하안거夏安居하며 물과 끊임없는 교감을 나눈다. 쪽은 체액을 배출하고 물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땅을 달구는 태양열에 발효되면서 물은 쪽빛을 온전히 수용한다. 어둠 속에서 쪽과 물이 하나가 되면 쪽은 내면의 깊이를 색깔로 말할 것이다.
친구가 작년에 말려둔 국화차를 우려낸다. 한 모금 머금자 담소에 노란 향기가 더해진다. 산골에 들어와 자연을 알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단다. 적절한 시기에 염료를 구해야 하고 그 색깔을 우려내려면 기다림이 필요했다. 도시의 색을 잊고 자연의 색에 익숙해지려는 노력에 사계절이 훌쩍 지나고, 땀으로 젖은 옷은 자연으로 물들어간다.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온 친구도 쪽처럼 오래도록 묵언수행을 하며 내면을 깊이 파고들었으리라.
며칠 전 쪽을 담가 둔 항아리를 연다. 쪽잎에서 녹색 기운이 사라질 즈음 한 번 뒤집는다. 첨벙첨벙 물이 흔들리면서 쪽은 바깥공기로 숨을 쉰다. 어둠에 싸여있던 쪽은 그제야 한 줄기 빛을 받아 물에게 자신의 빛을 내놓는다. 마지막까지 제 몸을 우려낸 쪽을 건져 항아리 위의 햇대에 걸친다. 늙은 부모의 속살처럼, 할 일을 다 한 쪽은 이제 알갱이는 물에 내어주고 쪼그라든 껍질만 남았다. 자신의 가치를 빛깔로 남기면서 쪽은 훨씬 자유로워졌다,
패각을 항아리에 넣고 대나무로 휘젓는다. 기포가 생기고 물과 분리되면서 쪽빛은 본연의 색을 서서히 드러낸다. 심연深淵의 색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듯 항아리 속의 물을 퍼 올린다. 잿물을 넣어 쪽 발을 세운 다음 미리 빨아놓은 천을 조금씩 담근다. 천으로 옮겨가는 물은 처음에는 녹색으로 보이다가 건져내면 청색으로 변하는 마법을 부린다. 적시고 말리기를 거듭할수록 쪽빛은 더욱 깊어진다.
친구와 내가 마주서서 천을 길게 펼쳐든다. 둘 사이에 쪽빛 길이 생긴다. 그 길을 따라 유년의 들판으로 돌아간다. 친구와 나는 각시 풀을 뜯어 인형을 만들곤 했다. 반을 접어 얼굴을 만들고 나머지는 머리카락을 땋듯이 묶어 올리면 예쁜 풀각시가 되었다. 풀각시는 수수대궁 총각에게 시집을 보냈다. 예물은 꽃반지에 음식은 쑥을 찧어 만든 풀떡이었다. 그렇게 쪽빛은 유년의 빛깔에 우리를 빠트렸다.
파랑은 근원根原의 색이다. 바다색에서 파랑 그리고 남색에서 감청색까지 점점이 깊어지는 색은 신비롭다. 처음에는 하늘색이었다가 바다색으로 깊이를 더하는 쪽빛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심연에 닿아 꿈의 색깔이 된다.
두루마리의 금니감지를 보았다. 금니감지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환상의 길을 만들었다. 밤하늘에 몇 개의 별들이 돋아 오를 때, 하늘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푸른빛을 띤다. 별빛을 보고 마감하는 하루가 차곡차곡 쌓여 달이 되고 해가 된다. 사막ㅇ르 걸어 비단을 찾으러 가는 낙타처럼, 우리네 삶도 꿈의 색깔을 찾아 내일로 떠나는 머나먼 여정일지 모른다.
내 본연의 색깔은 무엇일까. 이십 대를 지나면서 조금씩 빛이 바래다가 엄마가 되면서 유년의 색깔은 흔적밖에 남지 않았다. 가끔 내 속을 들여다보면 물색이기도 하다가 더러 사라진 꿈의 색깔이 희미하게 스치기도 한다. 이러다가 영원히 빛나지 못하고 잿빛으로 스러지는 것은 아닐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움이 짙어진다. 자신의 색깔을 찾아 떠난 친구처럼, 언젠가는 나도 나만의 색깔을 찾아 행장을 꾸릴지도 모를 일이다.
헌 것을 버리지 않으면 새것으로 채울 수 없고, 헌 길을 떠나지 않으면 새 길을 낼 수 없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쪽처럼 친구는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 내면의 색을 펼쳐냈다. 한때 자신을 푸르게 하던 이파리들을 다 털어내고, 긴 겨울 수행의 시간을 지나 다시 푸른 봄을 맞고 있다. 자신을 온전히 다 내 놓아야 완성되는 빛,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진 쪽빛은 내일이면 더욱 짙어질 것이다.
이제부터는 햇살과 바람의 몫이다. 바람을 부르기 위해 바지랑대를 높이 세운다. 천이 만장처럼 펄럭이자 바람조차 푸른빛을 머금는다. 바람에 실려 수평선과 하늘이 맞닿는 곳으로 가면 나의 빛깔을 찾을 수 있을까. 빛깔을 찾아 수면 아래 아래로 유영하다가 심연에 가닿으면 태곳적부터 내려온 그리움의 색을 만날 수 있으려나. 푸름에서 시작해서 다시 푸름에 닿기 위해 나 또한 먼 길을 돌아오지는 않았던가.
情이 깊어지면 靑이 되고, 靑이 깊이 침윤되면 淸이 된다. 그리움에도 빛깔이 있다면 쪽빛이 아닐까. 오늘은 내 마음도 쪽빛으로 펄럭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