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 / 문경희
출발 10분 전, 실내 조명등이 켜진다. 내내 굳건한 함구를 풀지 않던 슬라이딩 도어도 스르르 빗장을 열어젖힌다. 당신의 모든 것을 허용하겠다는 따뜻하고도 너그러운 호의에 감전되듯, 사람들은 하나둘 텅 빈 사각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 우람한 네 바퀴가 나를 인도해 줄지니. 한 시간 남짓, 언젠가부터 그에게 나를 맡기는 고요의 시간이 좋아졌다. 그를 무한 신뢰하며 무거운 다리를 쉬게 하고, 졸다, 깨다, 혼곤하게 정신의 풀기를 눕혀도 본다. 붉은 띠가 선명한 내 집행 시외버스의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에 동승하기 위해 나도 기다림을 추스르고 탑승구로 들어선다.
모바일 승차권을 다운받는다. 본의 아니게 최근 들어 자주 도시를 오가다 보니 내가 애호하는 일인용 좌석을 선점하기 위해 스마트하게 휴대폰으로 예매를 해두는 편이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키오스크 앞에서 스크린 터치를 해야 하는 세상이라 특별할 건 없지만, ‘삐’, 기계가 경쾌하게 읽어 내리는 QR코드는 내가 웬만큼 세상과 보폭을 나란히 하고 산다는 확인 같아서 괜히 뿌듯해진다.
자리를 찾아 앉고서야 휴대폰을 다시 챙긴다. 아직도 켜져 있는 QR코드, Quick Response Code는 말하자면 즉문즉답과 같은 의미다. 기기의 센서가 코드를 감지하는 그 짧은 순간에 가부가 판가름난다. 저 괴괴하기조차 한 흑과 백의 난삽한 조합 어디에 내가 들어있으며, 그 속에 나는 어떤 인간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일까. 새삼, 기호화된 나의 또 다른 정체성이 낯설기만 하다. 그러하여도 덕분에 안온한 귀가를 보장을 받은 셈이니 굳이 골치 아프게 그를 캐려 들 필요까지는 없다. 와중에도, 바코드로 읽히는 계산대 위의 물건으로 전락해버린 것 같은 야릇한 피해의식마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긴, 그마저도 단방의 성취는 아니었다. 해당 사이트에서 예약을 하는 일에도 처음엔 갈팡질팡했다. 현장 발권을 하고서야 거머쥔 차표 한 장, 그것까지도 그럭저럭 순탄했다. 그러나 발전이라 칭해지는, 너무 빠른 변화는 자주 나를 황망케 했다. 아예 실체가 없어진 표를 사용하는 일은 여지없이 나를 낡은 기성세대로 규정지어 버렸다. 인식기의 위치를 찾아 더듬거렸고, 코드를 제대로 다운받지도 않은 채 인증을 청하는 실수도 저질렀다. 결정적으론 버스가 연착을 한 뒤 감쪽같이 코드가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보관함으로 넘어가 있는 걸 찾아내느라 잠시 동안 낯 붉어진 일도 있었다. 이제 겨우 자연스럽게 표 없는 표를 내밀게 되었으나 지나온 나의 흑역사를 누가 알 것인가.
통과의례를 치렀으니 폰을 닫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돌아간다는 느긋함을 즐기기에 막차만큼 적격인 곳이 없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차편이 끊기는지라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거나 소주 몇 잔으로 거나해지는 밤의 쾌락은 애초에 포기를 했다. 발동이 걸리는가 싶게 억지로 시동을 꺼야 하는, 그 불유쾌한 기억은 한두 번으로 족했다. 대신 오래 잊었던 막차의 감성을 되찾을 수 있었으니까.
누군가는 여유롭게, 누군가는 막차라는 배수진에 간당간당 몸을 싣는다. 하나둘 좌석이 채워질 때마다 털썩, 그들이 내려놓는 하루의 무게감이 등줄기로 읽힌다. 말이 없어도 들리고, 말을 건너뛰고라도 위무하고 싶어지는 생의 단편들을 공유하는 공간이 막차다. 설사 뜨거웠던 오늘의 끝에 더 뜨거운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 한들 막차 속에서마저 전투력을 긁어모으는 이는 없다. 막차는 그런 시공이므로, 두 발에 묻히고 온 길의 잔재들을 떨어내며 나도 아무렇지 않게 내 무게만큼의 파장을 일으키는 일에 이력이 붙어간다. 돌아갈 집이 있고, 나를 데려다줄 약속이 있는 한 잠시 나를 꺼두는 일에도 불안하지 않게 되었다.
널찍한 좌석에 몸을 묻는다. 화려한 네온사인을 벗어낸 버스는 캄캄한 어둠을 달린다. 붉고 푸르던 하루치의 미사여구도, 습관처럼 주워 담던 휴대폰 속의 그렇고 그런 문장도 아득해지는 시간. 두 눈을 내려 닫은 채, 나도 까무룩 방전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