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깟 추위가 무슨 대수라고 / 김진진
기세등등하다. 바깥 창문 구석에 조그만 얼음꽃이 피었다. 바람을 동반한 겨울 추위는 체감온도를 실제 기온 그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아침뉴스를 보니 모두들 중무장한 채 출근길을 바삐 서두르고 있다. 아무리 서슬 퍼런 맹추위라도 살아가는 발길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러니 뛰든가 걷든가 종종걸음을 치든가 택해야 한다.
몰려드는 찬바람에 볼이 얼얼할 지경이지만 긴장감이 살아나서 좋다. 오리털 점퍼에 모자, 목도리, 장갑까지 시베리아 벌판을 지나는 순례자처럼 중무장을 하고 나왔어도 정신이 번쩍 든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모처럼 온몸이 활기로 가득차서 근육과 세포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느낌이다. 심장박동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음이 확실하게 전달된다. 느슨한 풀어짐보다 살아 있는 감이 확연해서 오히려 기분까지 맑아진다.
초등학교 담을 따라 긴 모퉁이를 막 도는 찰라 '어?' 하는 생각에 갑자기 발걸음이 늦춰진다. 한 남자가 골목을 서성이며 책을 읽느라 골몰해 있다. 목장갑을 낀 손에 책장 한쪽을 말아쥐고 글자에 코를 박고 있지 않은가. 천천히 지나며 보니 깨알 같은 글자들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분명 잡지도 아니고 소설류를 읽고 있는 듯하다. '박진감 넘치는 무협인가? 아니면 역사물?' 이 추위에 저리 골몰해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한 재미에 빠져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조신한 발걸음으로 그 옆을 지난다. 혹시 제목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고 슬며시 고개를 틀어 몸을 조금 낮춰 보아도 무슨 책인지 알 수가 없다.
색 바랜 점퍼에 오래된 군화, 무릎이 튀어나온 낡은 솜바지. 먼지가 낀 듯 손질도 안된 머리칼이며 제법 두툼한 책갈피까지 무심한 척 샅샅이 훑어보아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골목 중간쯤에서 무언가 철골 구조물 자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온다. 방풍막을 둘러치고 한창 집을 지어 올리고 있는 연립주택이다. 안에서는 벽을 울리며 꽝꽝거리는 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거기 어디쯤에 어울릴 것 같은 차림새의 남자다.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보란 듯이 혼자 책을 들여다보기는 난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사장 십장인가?' 투박한 몸매며 제법 거칠어 뵈는 주름들까지 사십 대 중반은 지났음 직하다. 골목을 관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훑고 지나간다. 다시금 걸음이 빨라진다.
이 추위에도 우체국 안에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연말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각종 우편물과 택배를 포장하는 사람들로 분주하게 돌아간다.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따분한 표정이 역력하다. 꽤나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서야 들고 온 서류 봉투들을 다 부치고 돌아선다. 문을 밀고 나오니 볼을 스치는 찬바람이 더욱 싸늘하게 다가온다.
사거리를 지나 건널목을 건넌다. 사람마다 두툼한 차림새가 불어닥친 한파를 대변하는 중이다. 추위 탓인지 거리를 오가는 인파가 평소보다 헐거워 보인다. 상가 옆길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마냥 제법 그럴 듯하다. 편의점 앞을 지나 전봇대를 돌고 아까 그 골목길로 접어든다.
저 앞 중간쯤에 누군가 고개만 삐죽이 삐져나와 있다. 망치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는 중이다. '아직도?' 그는 지금도 여전히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아까와는 달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큰 골목을 벗어나 있을 뿐이다. 건축자재가 어수선하게 쌓여 있는 연립주택 공사장 바로 옆 작은 골목에 몸을 부리고 앉아 독서 삼매경이다.
혹여 방해라도 될 새라 이번에도 발소리를 죽이고 스치듯 가만히 지나간다. 그의 발치 앞에는 시꺼멓게 그을린 철제통이 여러 개 쌓여 있다. 음식점에 납품되는 커다란 식용유 통들이다. 모른 척 지나치며 보니 그 안에 허옇게 타다 만 갈탄들이 수북이 들어 있다. 인부들이 추위를 견디려고 피우던 간이난로다. '열기가 조금 남아 있는 걸까?' 알 수 없이 번지는 이 미안함은 대체 뭘까 싶다. 투박함을 내비치는 보잘것없는 한 사람이 지금 한껏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이깟 추위가 무슨 대수라고' 온몸으로 항거하듯이.
이상스레 바짝 긴장감이 몰려든다. 어쩌면 당혹감인지도 모른다. 남루한 일상이 몸에 밴 사람이라고 해서 정신마저 보잘것없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주변 상황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않는 이 풍경을 두고 그저 흔히 보는 예삿일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자가 아니어도 그토록 무감각할 수 없는 내 자신이 갑자기 무게를 잃은 것처럼 기우뚱하게 다가든다. 자신의 순결한 정신을 고양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허름한 삶의 자세 따위를 논하는 것은 차마 부끄러운 짓이다.
조심스레 그곳을 지나치자니 어딘가 내 삶의 지형도에 알 수 없는 자각이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 내 안에 살펴야 할 그 무엇들이 잠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아마도 세차게 흔들어 깨워야 할 때인가 보다. 불현듯 마주친 낯선 사람 하나가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처럼 한겨울 추위 속에서 신선한 물음들을 던져주고 있다. 몇 번을 뒤돌아보아도 거기 그 자리에 환한 그 무엇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