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꿈 / 김정례
손바닥에 희디희게 묻어난다. 부드러우면서도 무게가 느껴지는 뼛가루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다. 모아 쥔 주먹을 차마 펼 수가 없다. 마음을 다잡고 허공을 향하여 뼛가루를 뿌린다. 바람에 날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에 날아온다. 아들의 마지막 손길이 스치는 것인가.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린다. 고달픈 이승의 옷을 벗었으니 훨훨 날아가려무나. 찬바람도 불지 않고 맘껏 달려도 숨차지 않은 곳, 꽃과 같이 노닐 수 있는 따스한 도솔천, 그곳에 오르기를 염원하는 기도가 가슴을 메운다.
결혼 후 내리 딸 다섯을 낳았다. 그 후,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얻었다. 아들을 낳은 뿌듯함과 대를 이을 손을 낳아 책임을 완수하였다는 안도감에 하루하루가 마냥 행복했다.
아이가 갓 돌이 지났을 무렵 소아과를 찾았다. 가벼운 감기인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입원을 하라는 것이다. X레이를 한참 들여다본 의사는 선천성심장판막증이라고 한다. 처음 듣는 병명에 어리둥절했다. 딸만 다섯인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의사선생님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일곱 살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청천 하늘에 벼락이 친들 이보다 더 할까.
한 달여 동안 입원하며 여러 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이를 시작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아졌다. 감기는 심장병 환자의 단골손님이며 천적이다. 아이를 집에 두고 잠시 외출을 하였다가도 하늘에 먹구름이 끼거나 바람만 세게 불어도 서둘러 집으로 와야 했다. 세 살을 넘기면서 부터는 서울의 큰 병원에도 내왕하며 더욱 아이에게 매달려야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감기에 걸리면 아이는 축 늘어지고 호흡이 가팔랐다. 이럴 땐 마음이 급하고 불안하여 내 심장은 콩콩 뛰었다. 아이를 안고 서둘러 병원으로 가는 동안 집에 남은 가족이 병원에 연락을 취한다. 도착하자마자 입구에 서 있던 간호사가 아이를 낚아채듯 받아서 산소 방으로 달려간다. 이렇듯 병원의 살뜰한 배려로 아이는 몇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아이의 고통이 어미의 부덕인 것 같은 자책감에 참회의 기도로써 명을 빌고 또 빌었다.
아들이 여섯 살 되던 해에 5계를 받았다. 해남 두륜산 토굴의 지옹선사를 스승으로 유발상좌가 되었다. 계명은 천용天龍이다. 일곱 살을 넘기기 힘들다는 진단이 마음에 걸려, 불심이 모자라는 어미보다 스님께서 기도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 욕심이었다. 정진에 방해가 된다면서 제자도 정하지 않으시는 노스님이 무슨 인연으로 천용을 속가 상좌로 받아주셨을까. 스님은 때때로, 천용이 건강을 지키도록 '소식하라, 간식 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천용을 보기 위해 산을 내려오셨다. 어린 상좌 천용이 스님께 방석을 내드리고 드실 물을 떠드리는 시봉을 한다. 나는 귀한 스님 오셨다고 친구 불자들을 방안 가득 초청했다. 스님은 천용을 무릎에 앉히고 제가 불자들의 신행생활에 대한 법문을 하셨다.
천용은 5계를 받고 한 번도 계를 파하지 않았다. 어쩌다 방바닥에 개미가 기어가면 책받침에 올려 살려주곤 하였다.
천용이 갓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소화영아재활원이 있었다. 그곳은 스스로 먹지도 걷지도 못하는 선천성 불구로,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거나 집에서 돌보기 힘든 중증뇌성마비아이들을 돌봐주는 곳이다. 그곳에서 봉사하는 고향 동창 박 헬레나 수녀님을 찾아가 작으나마 도움을 주곤 하였는데, 천용이도 한 번 같이 가본 적이 있다.
천용이 제 동생과 동네 친구 7, 8명을 모아 '용맹한 호돌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는 것을 후일에야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88올림픽이 개최되기 전, 올림픽 마스코트로 호돌이가 결정되어 온 나라가 호돌이 붐이 일어났을 때였다. 천용이 만든 용맹한 호돌이 노트엔 친구들의 이름이 별명으로 적혀있다. '키 큰 호돌이, 귀여운 호돌이, 까불 호돌이, 꾸러기 호돌이, 토실토실 호돌이, 임호당 호돌이, 점박이 호돌이.' 자신은 '해골 호돌이'라고 했다. 아마도 자신의 마른 몸의 상징인 것 같다.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와 주민등록번호까지 씌어있다.
그리고 '회비가 많이 모이면 불쌍한 이웃을 찾아가기로 함'이라는 목적을 써놓기도 했다. 회원들이 모은 작은 용돈으로 크리스마스를 기해 소화영아재활원에 생필품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느 회원 이름에 빨간 표시를 하고 '퇴장'이라고 쓴 것을 보며 잠깐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나름의 엄한 규칙을 정했던 것 같다. 1년여 기간 동안의 기록이 담긴, 호돌이 대장 천용, '해골 호돌이'가 남긴 어설픈 그림 일기장은 지금에야 차분한 마음으로 꺼내볼 수가 있다.
천용이 열두어 살 때쯤 지리산 쌍계사로 참배 여행을 갔다. 시원한 강바람을 타고 섬진강변을 달렸다. 강물이 반짝거리며 차창 밖으로 따라오고 있다. 명랑하게 창밖 풍경을 보고 있던 천용은 문득, '내가 죽으면 스님처럼 화장해주면 좋겠다.'고 한다. '강물에 뿌리면 추워서 감기에 걸릴 것 같으니 경치 좋은 산에 뿌려 달라'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말한다. 뜻밖의 말에 말문이 막히면서 얼른 말을 돌렸다. '엄마가 먼저 죽을 텐데 무슨 말이냐'고 분위기를 환기시켰으나, 이미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창밖의 경치만 볼 뿐 별다른 말이 없다. 속울음으로 명치가 아파왔다. 아이가 자기의 죽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니. 고통스러운 육신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은 열망인가. 천용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88올림픽 개막을 한 달 앞둔 열네 살이 되던 해 또다시 병원에 입원을 했다. 천용이 올림픽 장면을 녹화할 비디오 공테이프를 거실에 쌓아놓은 상태였다. 항상 그랬듯이 입원하여 한 일주일간 치료받으면 퇴원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병세가 점점 악화되면서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평소 참을성이 많아 웬만큼 아플 땐 내색조차 않던 천용의 눈빛에 괴로움이 가득하다. 산소 호흡과 진통제로 고통을 달래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심장에 물이 차고 소변도 힘들었다. 수돗물을 틀어 흐르는 물을 보고 소변을 보도록 유도하기도 했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는다.
만약 천용이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숨이 끊어지는 얼굴을 가슴에 담고는 살아가기 힘들 것만 같았다. 이것이 나의 속마음으로 생각한 바람이었다면 신께선 왜 하필 그것만을 들어주셨을까. 천용이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병실을 지키는 가운데 평소처럼 낮잠이 들었다. 이 잠이 깨어날 수 없는 영면이 될 줄이야.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지금껏 아이를 내 가슴 한 편에 묻어두고 있었던 것인가. 왠지 그 아이 이름만 꺼내도 눈물이 강을 이룰 것 같아 애써 기억을 외면했다. 아들을 보내고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의연히 그의 이름을 부른다. 천용이. 하지만 아직도 목이 메어옴은 어인 까닭인가.
언젠가 여행길을 함께했던 섬진강 둑, 마음속에 그려 넣었던 풍경, 천용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그 곳. 하동군 금남면 어느 수려한 산자락에 8월 한여름 밤의 짧았던 꿈이 서려있다. 그곳에 발길이 닿으면 나는 또 다른 깊은 꿈속으로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