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꽃구름 / 지연희

꼭 10년 만에 속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마다 가지 끝을 헤집으며 제 모습을 내어 보일 것이라는 내 기대를 외면하더니 신통하고 고맙기 짝이 없다. 이제야 남편의 불신을 불식시킬 확고한 증거를 보여 주게 된 셈이다. 처음엔 예년에 보여주던 잎줄기인 줄 알았다. 마른 가지를 뚫고 솟아나는 연한 연둣빛 생명의 눈이 꽃봉오리라 단정하기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아니 하루에도 몇 차례나 가지에 돋아나 눈에 띄게 성장하는 나무의 숨소리를 점검했었다. 그리고 근 일주일에 가까운 어느 날 아침 나는 그 연둣빛 생명의 눈이 잎줄기가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한 작은 봉오리들의 결집체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환호성을 지르며 제일 먼저 남편을 불렀다.

" 여기 좀 와 보세요 "

해마다 꼭 10년을 조바심하게 하더니 등나무는 이제야 마음의 문을 열고 꽃을 피워 내기 시작한 것이다. 꽃의 시작을 확인한 남편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리고 첫 마디의 말이 '아마도 금년에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데'였다. 무엇보다 십 년 전 땅에 묻힌 등나무를 이곳 옥상의 화분으로 옮겨오면서 지나친 욕심으로 잘 자라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죽이고 마는 건 아닌가 우리는 염려했었고 틀림없이 꽃을 피울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 꽃을 피우지 못하는 등나무도 있다는 남편의 상반된 견해로 등나무는 우리 집 옥상 한 쪽에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집에서 이삿짐을 싸며, 작은 정원에 심겨 있던 몇 그루 유실수도 탐이 났지만 과실수보다 꽃 보기가 더 행복할 듯싶어 두 그루의 화목류에 눈길을 주었다. 유독 맑은 자줏빛 아름다운 꽃을 피우던 목단 꽃과 이주되어 이 년 만에 첫 번째의 꽃을 피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등나무를 새 집에 옮겨오기로 마음먹었다. 등나무의 뿌리를 캐며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모른다. 땅속 깊이 뿌리를 박은 나무는 제법 깊이 흙을 팠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잔뿌리는 다치지 않게 손을 쓰고 굵은 뿌리는 톱질을 하고서야 겨우 몸체를 드러내었다. 뜻하지 않게 뿌리 일부가 잘려나간 등나무는 큰 상처를 입은 탓인지 새 집에 이주가 되던 첫해는 머물렀던 꽃봉오리며 잎새를 모두 떨구어 버렸다. 첫 번째 맺은 봉오리를 생으로 잘라버린 셈이었지만 나는 일 이년 후면 다시 꽃을 맺을 수 있으려니 했다. 남편은 당료 합병증 두 달간의 입원 끝이라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등나무 꽃봉오리를 내가 잘못 보았을 것이라 오래도록 판단하고 있었다.

봉오리를 물기 시작하여 근 열흘이 지나서야 우리 집 옥상은 보랏빛 꽃 잔치를 벌일 수 있었다. 마치 수십 개의 등을 밝혀 놓은 듯 주렁주렁 매어 단 등꽃을 나는 어디서 건 자랑하기에 바빴다.

"우리 집 등나무가 십 년 만에 꽃을 피웠어요. 보고 싶지 않으셔요. 놀러오셔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지도 않은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곤 했다. 모든 꽃이 다 아름답고, 저마다 지닌 매력으로 보는 이에게 기쁨을 전해주지만, 등나무의 꽃을 바라보면 종알거리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감지할 수 있고, 보랏빛 등불을 켠 초롱의 환한 밝기를 느낄 수 있다. 길가에 서서 옥상 끝에 가지를 뻗고 층층이 매달려 있는 보랏빛 등불을 올려다보면 신비하기 그지없다. 공연히 즐겁고 행복해진다.

어쩌면 등나무는 순결을 잃은 처녀의 아픈 상처를 갈래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 어린 나무의 첫 번째 꽃봉오리를 짓밟아 놓은 장본인이지만 나는 분명 등나무를 사랑하여 욕심을 부렸다. 나의 사랑이 짝사랑일 수 있었지만 등나무는 나의 속 깊은 기도를 알아들은 듯싶다. 십 년 전 아주 가늘게 보여주었던 꽃봉오리를 다시 보여주지 않을까 조바심하며 마른 가지를 지키던 나의 갈망을 헤아린 듯싶다. 오랜 반목에서 화친의 손을 잡듯, 해묵은 불신의 벽을 허물고 남과 북이 화해의 깃발을 올리듯 나의 믿음에 등나무는 화답의 꽃을 피워 주었다. 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입 닫고 침묵하여 지키다가 마음을 열어 내 가슴 가득 보랏빛 꽃 등을 밝혀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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