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익어가는 시절 / 배혜경

 

 

모시 속 같다. 은쟁반은 아니어도 민무늬 사기접시면 어떠리. 그 위에 누운 연둣빛 탱글탱글한 알을 똑 떼어 깨물어본다. 입천장을 툭 치고 물기가 번지며 눈이 열린다. 머릿속에 산들바람 한 자락, 엎드려 있던 감각들이 일렬종대로 일어선다.

성하(盛夏)를 앞두고 색색의 과일이 알몸을 드러낸다. 과육을 머금은 그들 앞에 서면 침이 먼저 고이고 더위에 지친 몸만큼이나 번다한 일상사에 지친 마음이 상큼 일어난다.

요즘은 꽃도 과일도 철이 없다. 어릴 적 청포도는 제삿날에나 보는 귀한 과일이었다. 특별하고 그래서 결핍이었던 아련함을 불러주는 청포도가 요즘은 수입산의 등장으로 흔해졌다. 귀한 줄 모르고 먹어서인지 맛이 예전 같지 않다. 게다가 알이 굵고 송이도 엉성하여 알알이 영글어 맺힌 우리 청포도에 비해 매력이 덜하다.

청포도 한 알을 다시 떼어 입 안에 굴려본다.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시인 이육사.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얻은 수인번호를 영원히 달고 죽은 시인은 이미 1939년에 시 「청포도」를 발표했다. 그의 고향은 안동이지만 시 속의 고장 혹은 고향은 포항 오천면이다. 건강이 악화되어 이곳에 와 휴양하던 중, 이 일대의 청포도 농장이 병든 시인에게 시적 감흥을 주었다. 병든 시절인들 비단 그때뿐이었으랴.

 

육사는 「청포도」에서 자주독립의 강직한 염원을 고운 시어로 빚어 암흑의 시대에 간절한 희망의 전설을 전한다. 그 전설은 칠월에 익어가는 청포도로 영근다. 주렁주렁 맺히는 연둣빛 알 속에는 먼 데 하늘의 꿈과 푸른 바다에 밀려오는 흰 돛단배가 어룽댄다. 청포(靑袍) 입은 고달픈 손님이 흰 돛단배를 타고 오는 상상은 초현실적 심상은 현실을 넘고자하는 강렬한 열망에서 온다. 귀한 손님을 ‘두 손 흠뻑 적셔’ 맞이하는 툭 트인 마음길이 빛살처럼 훤하다.

가난도 투쟁도 상품이 된 오늘날, 누구의 어느 시절인들 헐벗고 막막한 때가 없을까. 억압과 궁핍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우리의 소망은 그 끝을 모른다. 그러니 부재하는 고도(Godot)를 날마다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로 실존할 수밖에.

그럼에도 위대한 우리는 누추한 삶을 구원해 줄 청포 입은 손님을 기다리며 살아봄 직한 삶을 이어간다. 자만과 자책으로 착각과 권태가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고 하수구 비누거품처럼 싸구려 욕망이 들끓을 때면 청포도 한 알 한 알을 굴려서 깨물어볼 일이다.

우리의 시절,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에.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육사 詩 「청포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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