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닛돈이 쌈짓돈 / 김병우

 돈에는 관심이 적었다. 육십 언저리까지 살아오면서 돈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이 나이 먹도록 현금카드를 한 번도 사용해 보질 못했다면 누가 믿겠는가. 평소에 은행 갈 일이 적었고 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혼 때부터 집안 살림은 아내가 도맡아서 해왔다.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살림을 꾸리는 게 자신이 없어 갖은 핑곗거리를 만들어 아내에게 떠넘겼다. 의도적으로 골치 아픈 살림꾼이 되지 않으려 달아났다. 아내는 비겁하게 마누라 등 뒤에 숨는다고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아내는 없는 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시부모님 부양하랴 적잖은 제사까지 감내하면서 살아왔다. 적은 수입으로 빠듯한 살림살이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보니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궁색한 말로 얼버무리기에 바빴다. 공직자는 자고로 황금 보기를 돌보듯 해야 뒤탈이 없다고….

그런 내가 퇴직 후 은행 방문이 잦아졌다. 한동안 은행 직원의 힘을 빌리거나 시행착오를 겪었었지만, 각종 공과금을 계좌이체하고 현금자동지급기에서 돈을 찾는 걸 스스로 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변화였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했던가. 요즘은 슬슬 욕심이 나기도 한다. 얼마 전, 퇴직자 모임에서 어느 선배가 툭 던진 말이 불씨가 되었다. 자고로 남자는 수중에 돈이 있어야 힘을 쓸 수가 있으니 마누라 모르게 비자금을 따로 잘 챙겨 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혼란스러웠다. 비자금은커녕 평생을 주머닛돈이 쌈짓돈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하물며 내가 매달 타 쓰는 용돈의 사용처도 아내는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손오공이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 아내 모르게 비자금을 따로 만든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요, 먼 얘기일 수밖에 없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이나 쌈지 속 돈이나 마찬가지니 굳이 네 것 내 것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 할 것 같다. 지인의 아들이나 조카들을 봐도 그렇다. 집을 사도 공동명의로 재산 관리도 따로 하고 산다고 하지 않는가. 예전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들이 요즘 신혼부부에게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주머닛돈과 쌈짓돈을 제각기 구분하고 사는 세상이 된 것이다.

우리 세대는 집안 경제권을 남자가 도맡아서 하는 경우가 적었다. 간혹 부부가 따로 통장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드물었다. 나처럼 아예 전권을 아내에게 넘겨줘 하나에서 열까지 다 알아서 하도록 일임해버리는 살림 무관심형이 많았다.

부부가 되고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도록 살아왔는데 새삼스럽게 통장을 내가 관리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볼썽사나운 일이다. 애당초 그런 능력이 모자라 골칫덩어리를 끌어안지 않으려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아내가 하는 대로 맡겨두는 게 백 번 옳다 여기면서도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우리 부부는 남다른 인연으로 만났다.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우인 대표들끼리 모인 장소에서 눈이 맞았다. 당시 나는 부산에 살았고 아내는 대구에 살았다. 고향이 같았고, 각자 태어난 곳이 불과 1킬로미터 안팎이었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서로의 관심으로 표출되었던 것 같다.

결혼하기 전, 아내와 장모님은 용하다는 점집에 점을 보러 갔었다고 한다. 예비 사위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보기 위해서다. 내 사주를 넣었더니 점쟁이 말이 이 사주는 천만금을 안겨줘도 간직하지 못하고 다 말아 먹을 박복한 팔자라 했단다. 그러니 사업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더란다.

점쟁이도 그런 말을 해놓고는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녀를 향해 한마디 툭 던지더란다. 사위 될 사람이 그나마 관운은 있어서 밥은 굶지 않겠다고 말이다. 나는 결혼도 하기 전에 팔자에 재물 복 없는 주인공으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그것이 원인인지 그 후 돈과 관련된 집안의 대소사는 내 손을 떠나 모두 아내에게 넘어가 버렸다. 아내는 부부로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니 그 점괘가 나름 용했다고 한다. 점쟁이 말처럼 내가 공직생활을 했으니 정년까지 버티었지, 개인회사였으면 잘려도 몇 번이나 잘렸을 것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 근무지를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옮겨 다녀야만 했었다. 그 바람에 보따리 살림이 되었고, 재물 복하고는 애초에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 먹듯 내 마음대로 돈을 찾아 쓰는 통장이 없으면 어떤가. 아직도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나는 행복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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