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병 / 유강희

 

 

내가 예닐곱 살 무렵일 것이다. 아버지의 술심부름으로 나는 대두병을 들고 버스가 다니는 큰길가 점방으로 술을 받으러 간 적이 있다. 시골에서는 술을 사러 간다고 하지 않고 받으러 간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항상 술 앞에서 옷섶을 여미게 한다. 나는 한여름 시내를 건너고 들을 지나 대병이라고도 부르는 이 대두병에 막걸리를 받아서 훅훅 내리쬐는 땡볕 아래 어질어질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시내를 건너기 전 팽나무 밑에서 나는 그만 커다란 불경(?)을 저지르고 만다. 누가 볼세라 나무를 등지고 얼른 한 모금, 또 한 모금 숨죽여 술을 마셨던 것이다. 그 순간에도 병의 눈금을 조마조마 보아가면서 말이다. 땀은 찔찔 흐르고 목이 탄데다 호기심까지 칭칭 날 옥죄어 끝내 아버지 술을 탐하게 한 것이다. 뒤늦게 큰일이다 싶어 얼른 도랑물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물 탄 술병을 들고 비척비척 자갈밭을 걸어오다 그대로 자빠지고 만 것이다. 푸르스름한 깨진 병 조각이 곧장 오른쪽 손바닥에 박혔다. 나는 흥건한 피보다 아픔보다 먼저 이 부정한 사실이 아버지에게 들킬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영악한 나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부터 터뜨렸다. 막둥이네 집 앞을 지날 때는 더욱 기를 쓰며 볼륨을 높였다. 그게 효과가 있었던지, 아니면 큰 상처에 놀랐는지, 나는 술에 대한 추궁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 날을 나는 득의양양 목에 붕대를 두른 채 그 위에 오른쪽 팔을 매달고 다녔다. 그때는 웬일인지 학교 소사로 상이용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나는 부단히도 그 흉내를 내며 다녔던 것이다.

 

지금 내 오른쪽 손바닥 엄지 안쪽의 도도록한 곳에는 그때의 흉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술병의 푸른빛이 무슨 성흔처럼 박혀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다시금 그때의 일이 떠오르고 그 깨진 술병을 안쓰럽게 추억하곤 한다. 그와 함께 〈창작과 비평〉 2004년 겨울호(〈문화평〉란의 김승곤 글)에서 본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 〈무프타르 거리, 파리〉(1952)에 나오는 소년의 얼굴이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양손에 커다란 포도주병을 들고 흡족한 얼굴로 거리를 지나가는 그 소년의 모습에서 나는 어린 날의 내 금 가지 않은 얼굴을 훔쳐보는 것이다.

 

내 오른쪽 손바닥에 지금도 박혀 있는 술병. 모래 틈에 쏟아진 술을 단 한 방울도 입술에 적셔보지 못한 술병. 그 깨진 술병 조각은 숱한 물살에 시달려 지금쯤은 푸른 별이 되어 있겠다. 노래방이 등장하기 전인 3, 40년 전만 해도 술병에 숟가락을 꽂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사아고오옹의 배앳노오래~”가 “어어머니이임의 소오온을 노오코~”가 “아아 으으악새 슬피우우니이~”가 거기에서 흘러나왔다. 1980년대엔 술 대신 시너를 마시고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가 화염병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누군가의 분풀이로 대리석 바닥에 그대로 박살이 나는가 하면, 어느 땐 철부지 술꾼에 의해 흉기로 돌변하기도 한다.

 

술병은 이제 저마다 다른 포즈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국산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다종다양한 산(産)이 우리의 기호와 신분 계급에 따라 팔려간다. 맥줏집이나 백화점 그리고 고급 술집, 아니면 동네 허름한 슈퍼에서 술병은 자신을 숨긴 채 자신을 팔려고 내놓는다. 아이의 탄생에서부터 무덤까지 술병은 기꺼이 우리와 함께한다. 아기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서로 축하의 술잔을 나눈다. 성묘 때 무덤 앞에 꽂혀 있는 술병비를 더러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대개 우리와 친숙한 소주병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술병엔 혀가 없다. 그래서 술병은 전적으로 시적(詩的)이다.

 

술병은 온몸으로 술을 간절할 뿐, 한 치도 제 공허를 적시지 못한다. 이런 참혹 속에서 술병은 저 혼자 타오른다. 알코올의 도수만큼 술과 병 사이엔 검은 은하수가 흐르고 물 없는 강이 흐른다. 그 결핍과 격절을 받아 적기 위해 오늘도 약질의 서정 시인들은 술병을 꼬나 잡고 키스를 퍼붓는다. 아니, 정확히는 술에 입술을 창(唱)한다. 암, 으음, 거참, 하, 글쎄, 그러니까 술병은 술을 모른다. 술이 병을 모르고 병이 술을 모른다. 이 천애의 단절이 술병을 우울하게도 하고 미치게도 한다.

 

나는 한밤중 부엌 한구석에서 술병이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술병이 아니고 빈 병이다. 술병에서 빈 병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 술병은 오열한다.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수치감을 스스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술은 병을 잠깐 머물 간이역쯤으로 여기지만 술병은 술과 함께 하나의 분신, 하나의 전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술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 술이 자신을 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병은 또 한 번 시적이다. 이 참을 수 없는 모순을 껴안고 술병은 저만의 눈부신 시의 형이상학을 거침없이 우리 앞에 노출한다.

 

나는 지금 몇 푼의 빈 병으로 고물상에 팔려가기 싫어 참기름병이 된 옛 전우 같은 소주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도 날 연민하는지 엷은 눈빛을 보내온다. 시인에게 술병이란 하나의 만뢰(萬籟)와 같다. 이슬의 눈망울을 가진 악마이며 용천검(龍泉劍)을 든 보살이다. 아직 태어나기 이전의 아기씨다. 시와 시 사이의 어디쯤이다. 세상의 하고많은 시인들아, 술병에게도 너무 외롭지 않은 자줏빛 혀를 달아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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