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좋은 여자 친구는 ‘진리’라고, 과학자 뉴턴은 말했다. 그리고 어느 문학가는 ‘목매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가 문학이라고 했다.
‘문학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받고 불이 반짝 켜졌다. 나에게도 문학이 나의 사랑하는 나무임에는 틀림없으니 뭔가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다. 그런데 저 뉴턴과 같은 명쾌한 명언 하나가 생각나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글을 쓰면서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이 ‘퇴고’라는 것을 생각해 내고, ‘나는 퇴고를 위하여 글을 쓴다.’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다. 그럴듯하다. 정말 나는 퇴고를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문학은 나에게 ‘퇴고’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퇴고(推敲), 누구나 알고 있듯이 시문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는 일을 말한다.
서기 800년경 중국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는,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 : 스님은 달빛 아래 절간 문을 두드린다)”이라는 시구를 놓고 갈등에 빠진다. 두드릴 고(敲)를 밀 추(推)로 고칠까, 그만둘까? 두드리고 미는 시늉까지 해 보며 그는 작품 세계에 골몰했다. 그러다 글벗이었던 당시 최고의 문장가 한퇴지(韓退之)가 “고(敲)가 좋겠네”라고 하여 그렇게 하였고, 그 퇴(推)냐? 고(敲)냐? 고민하던 이야기가 오늘의 ‘퇴고’라는 말을 낳은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발음인 밀 추(推)가 당나라 때는 퇴(推)였던 관계로 ‘추고’가 아닌 ‘퇴고’로 굳어진 것이다. ‘추고’가 옳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으나,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퇴고를 거친 ‘퇴고’라는 말이 그대로 좋은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일필휘지하듯 흔쾌히 쓴 글이라도 다음 날 내 눈에는 그것이 가을 나뭇잎처럼 바스락거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나뭇잎에 물이 오를 때까지는 기약 없는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알 것이다. 적시고 말리고 떼 내고 붙이기를 수없이 해야 하는 우직한 다듬이질 없이는 한 문장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또한 잘 알 것이다. 처음부터 완성된 인격을 갖고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는 아무도 처음부터 완성된 글을 쓰지 못한다. 두드릴까, 밀까를 수없이 되풀이하는 그 ‘퇴고’라는 과정에서 철부지 아이가 중후한 교양인이 되는 것이다.
인생을 배운다.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나는 퇴고라는 과정을 통하여 글을 다듬어 갈 때마다 새로 인생을 배우고 새로 인생의 신비에 눈떠간다. 내 삶의 수양도 여기서 이루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이 허물을 남기듯이 아무리 노력해도 글은 허물을 남긴다. 인생과 글은 똑같이 먼 ‘길 없는 길’을 가는 나그네다. 그 글이 하나씩 허물을 벗을 때 나는 삶의 허물 하나씩을 벗어 가는 쾌감을 느낀다.
두드릴까, 밀까를 수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머나먼 길이 편안한 자연의 길이 되어 나타나곤 한다. 풀리지 않는 문장에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 하다가 시원한 바람처럼 내달리기도 하고, 털고 털어도 털리지 않던 흙 묻은 옥이 별안간 얼굴을 씻고 환한 빛을 내기도 한다.
그리고 퇴고는 무엇보다 내게 무엇을 버릴 줄 아느냐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다. 아깝다고 버리지 않으면 아름다운 꽃밭이 잡초 밭이 된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꽃밭의 아름다움처럼 절로 사람의 마음을 향긋하게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잘 버리고 잘 취할 줄 아는 균형 감각이 중요하나, 잘 버린다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편안하지 못한 것을 편안한 것으로, 평범한 것을 감동적인 것으로 바꾸고자 하는 그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퇴고는 또 다른 창작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창작의 뿌리는 ‘다시 보는 눈’에 있다. 다시 보는 눈은 놀라운 눈이고,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눈은 바로 ‘아는 만큼 보이는’ 격조의 눈이다. 독서와 사색, 부단한 감각의 훈련이 그런 눈을 만들어줄 것이다.
밀[推]까? 두드릴[敲]까를 고민하는 나의 시간은 언제나 내가 쓰는 짧은 글의 수십 배에 달한다. 그때마다 내게도 보이지 않는 글벗 한퇴지가 나타나 ‘이렇게 해 보게나.’ 하고 넌지시 일러 준다.
아! 그 순간의 빛남이여, 법열의 기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