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꼭지 / 정희승

 

 

침묵은 부패하기 쉬운 질료다. 밀폐된 방안에 너무 오래 괴어 있으면 쉽게 상한다. 오랜 세월 홀로 살아온 노모는 눅눅하고 퀴퀴한 침묵을 체질적으로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늘 물방울이 떨어지도록 수도꼭지를 헐겁게 잠가 놓는다.

똑 똑 똑…. 반향을 일으키며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소리, 그 소리는 결코 소음이 아니다. 노모가 직성에 맞게 침묵에 가미하는 일종의 향신료다. 이상하게도 방울방울 떨어지는 시럽은 괴괴한 정적 속에서 정채를 발한다. 특히 창 쪽으로 마른 옷이나 목수건을 네모반듯하게 개거나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읽을 때면 그렇게 조제된 적요가 풍미를 더해준다.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일상사가 비로써 미학적인 영양분을 얻어 중요한 의미를 획득한다. 물론 떨어지는 물을 모아 목욕물이나 허드렛물로 쓰려는 현실적인 목적도 있다. 노모는 새어나오는 양이 극히 미미하면 유량계도 눈 감아 준다고 굳게 믿는다.

말없음표도 일종의 누수다. 문장의 수도꼭지를 의도적으로 느슨하게 잠갔을 때 생성된다. 당연히 음밀히 의미가 침묵 속으로 누출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반면 마침표는 어떤 미적거림이나 망설임도 없이 수도꼭지를 단호하게 채웠을 때 따라붙는다. 물줄기가 가차 없이 끊기면서 남긴 마지막 물방울이 마침표가 된다. 말없음표, 그 끝없이 누설되는 방울마다에는 수많은 주름과 아득한 배음이 내장되어 있다. 그 의미를 파악하려면 물고기처럼 문장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러면 문장 속에 뒤섞인 다양한 의미의 흐름을 옆줄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 배관을 타고 계속 올라가면 결국 수원지에 닿는다. 모든 문장은 거기에서 발원한다. 방울마다에는 수원지의 수압과 오염도는 물론, 지나온 과정에서 섞이고 나뉜 물줄기의 정보가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다.

눈에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눈물도 일종의 말없음표다. 얼굴을 쓰다듬으며 슬픔을 읽는 여인에게 조용히 의미를 누설한다. 절규나 웅변보다도 더 큰 효력을 발휘할 때가 많다.

진정한 연인이라면 그 호소의 의미를 젖은 눈에서만 찾으면 된다. 심원한 곳, 물고기가 되어 그 물줄기를 따라 영혼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 곳에 푸른 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