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찌 / 최민자
진열장 안에서 팔찌를 꺼내 든 점원이 막무가내로 손목을 낚아채 갔다. 은색과 금색의 쇠구슬들이 정교하게 꿰어진 팔찌는 아닌 게 아니라 예뻤다. 가격 또한 착했다. 손목이 낚이면 마음도 낚이는가. 짧고 굵은 아줌마표 팔뚝이 내 눈에도 길고 우아해 보였다. 모임에서 만난 ㅎ의 팔목에 세련되게 어울려 보이던 팔찌 생각에 매장을 잠시 흘끗거렸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하는 망설임 사이로 시계나 반지 같은 호사는 왼손이 다 누렸지. 고생 많은 오른손은 여태 백의종군이었다는 생각이 바람잡이처럼 끼어들었다. 그래, 이참에 한번…. 장지갑 안의 카드가 어느 사이 점원에게 건너가고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손목을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매장에서보다 덜 반짝였다. 하루 이틀 지나니 빛깔이 더 죽었다. 돋보이고 싶어서 하는 액세서리가 나이 든 손의 초췌함만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 괜히 샀나 싶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자주 그랬다. 의류매장 안에서는 그럴듯하게 어울려 보이던 옷도 내 방 거울 앞에만 서면 낡아 가는 몸의 현주소를 아멸치게 일깨워 주곤 했다. 휘황한 물질의 성채 안에는 어떤 마법이 작동하기에 매번 눈이 멀고 혼이 빠지는가. 어쨌거나 돈이 요물이다. 햇빛을 피해 음습하게 스며들기를 좋아하는 돈이 주머니 안에 들앉기가 무섭게 기를 쓰고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하니, 온갖 핑계와 명분을 쏘삭이며 달아날 기회만 엿보는 돈은 남의 주머니에 옮겨 앉자마자 맞바꾼 사물의 표면에서 반짝이는 마법가루를 거두어 버린다.
"그게 바로 내 떡과 남의 떡의 차이지."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옆집 화단의 꽃이 붉고 남의 여자가 고와 보이는 이치에 대하여. 대상에 덧씌워지는 광휘란 주체의 욕망이 투사해 내는 신기루일 뿐인가.
손목을 들어 팔찌를 바라본다. 금빛 은빛 작은 구술들이 저희끼리 몰려 속살거린다. 문득, 내가 그를 욕망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욕망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스치고 지나간다.
사물들에게도 사람을 감별하는 영험함이 있지 않을까. 도꼬마리 씨앗이 털털한 사내의 바짓가랑이에 달라붙듯 진열장 안의 물건들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며 누구를 유혹해야 유리문 밖을 벗어날 수 있을까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을지 모른다. 무심히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유심하게 서로를 끌어당기며 관계를 맺고 인연을 지으려 드는 물리적 욕망이 만유인력 아니던가. 어떻게든 저 여자를 따라붙어야 해. 고고한 척 허영기 많아 보이는 저 어벙한 여자를 꼬드기지 못하면 언제까지 진열장 안에 갇혀 살지 몰라….
만물은 다 여행을 꿈꾼다. 잠든 것들은 깨어 숨 쉬는 것들을, 발 없는 것들은 발 달린 것들을 유혹하고 조종하여 암암리에 자리를 옮겨 앉는다. 사람이 만든 돈이 사람과 숨바꼭질을 하고 사람이 만든 컴퓨터가 사람의 일자리를 갈취해 버리듯, 세상을 추동하고 견인하는 동력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외연을 확장하며 세상 깊숙이 제 존재를 찔러 넣고 싶어 하는 사물들의 숨겨진 욕망이 아닐까. 금비늘 은비늘을 번쩍거리며 불시에 내 팔에 엉겨 붙은 이것, 신종 파충류 같은 이 활물活物이 올봄에 나를 어떤 풍경 속으로 휘몰아 다니게 할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