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의 힘 / 민은숙
숨이 막힌다. 더럽고 지저분한 것들이 들이대며 나를 포위한다. 끈적한 눈빛을 한 깜장들이다. 늘 그렇듯 조금만 내어주고 나면 곧 평화를 되찾으리라. 그들은 나와 묘한 애증의 관계이다. 가까울수록 나는 물려 작아지고 멀어지면 딱딱해진다. 부드러운 나와 단단한 나는 같은 듯 다르다.
도시의 놀이터에는 흙 한 줌조차 귀한 존재이다. 시소와 그네가 있는 풍경 속에서 겨우 만질 수 있던 흙모래도 제 정체성을 찾아 떠나버렸다. 20년간 박혀 있던 돌을 빼낸 자리에 굴러온 우레탄이 강력 접착제로 단단히 밀착했다. 귀한 모래놀이를 할 수 있는 큰길 건너 D 아파트는 적어도 30년 이상 묵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흙의 감촉에 아이가 해맑게 웃는다. 콘크리트 숲을 이웃한 구역에서 흙의 정기를 받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곳이 되었다. 단짝과 둘이 삽으로 오전을 팠던 조카를 데리고 들어왔다. 시키지 않아도 화장실로 직행한 아이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콸콸 뿜는 물줄기다. 고사리손에 물비누를 야무지게 조물조물 바른다. 불어나는 자잘한 동그라미 속에 밖의 흔적이 담긴 모습을 보며 가슴 속 환한 영상이 얼굴을 내민다.
천둥벌거숭이 시절, 자연을 벗 삼아 놀고 싶었다. 냇가에 굴러다니는 작은 조약돌은 안성맞춤인 놀잇감이었다. 돌로 공기놀이하고 땅을 파는 만큼 손끝에 거스러미가 늘었다. 검은 초승달 띠를 두른 손톱 밑 살은 바깥 활동을 열심히 한 훈장이었다.
밥때가 되면 놀이는 끝나고 귀소본능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딱딱한 비누를 문질러 낮의 지문을 지웠다. 동그란 거품은 민낯의 세균을 끌어안고 수채로 들어간다. 흡사 왜장의 몸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 같기도 하고, 새끼의 몸에 달라붙은 삿된 것을 등에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모정과도 같다.
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손을 꼽는 인류를 구한 물품 1호가 비누다. 매일 손발을 이것으로 씻기 시작하면서 감염과 질병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목욕하고 옷을 세탁하면서 수명은 20년이나 늘었다. 십 리를 걸어가야 작은 약방 하나 있던 얕은 골짜기에서 엄마는 가족의 주치의였다. 음식을 잘못 먹고 탈이 나면 수지침을 놓았고, 배앓이하는 밤이면 따뜻한 돌을 감싸 몸을 데우고 약손으로 단전에 기를 넣어 주었다. 찬 바람이 불면 천식을 앓는 딸을 위해 겨울마다 생강과 도라지를 다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뿐인가. 엄마는 모발 전문가이기도 했다. 미용실은커녕 단 하나 있던 이발소에 다녀온 딸이 온종일 훌쩍거려도 못 들은 척하는 줄 알았다. 어느 날, 팔을 걷고 마당에서 보자기를 쾌걸 조로처럼 펼치더니, 손수 머리를 다듬었다. 한여름 무성했던 머리칼이 싹둑 잘려 추풍낙엽처럼 수북이 마당에 쌓였다. 초등학교 생활 통지표의 종합 의견은 늘 단정하며 깔끔하다는 평이 있었다. 순전히 거품 같은 보살핌 덕분이었다.
비누는 관절 환자이다. 앉았다 일어날 때 무릎은 뭉크처럼 절규하고, 뒤틀린 뼈를 맞추느라 표정은 아찔하다. 걸어야 살지만 지나치면 물이 차오르는 딜레마에 빠진다. 의지의 한국인은 그럼에도 동그라미를 발산하며 움직였다. 눈에 밟히는 어리고 연약한 아이를 돌보러 엄마가 출동한다. 당신을 깎아낸 안전한 거품으로 손자의 방과 후를 품으러 간다.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거품이 늘어날수록 비누는 뼈가 갈라지며 쪼그라든다. 엄마의 기력은 예전 같지 않다. 한해 한해가 다르다. 빽빽한 숲이던 몸피는 스스로 벌목한 듯 듬성듬성 공백이 생겼다. 참선 수행한 비누처럼, 작은 오솔길이 몸에 새겨진다.
비누는 점점 작아지며 영혼을 거품으로 탈고한다. 숭고한 동그라미는 후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졌다. 노자가 말하는 자승자강(自勝者強)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자신의 몸피를 벗어내는 과정에서 나 역시 탈피의 고통에 줄줄 새던 시절이 있었다.
흑백만 존재하는 바둑이 삶이라면 어떨까. 순진하고 고지식했던 나는 흑과 백 너머 회색이 있다는 걸 좀처럼 용납할 수 없었다. 백 돌을 쥔 채, 겁도 없이 흑 돌을 쥔 미시 세계에서 많이도 부딪혔다. 둥근 세계에서 모난 나는 그렇게 부딪히며 모서리를 갈아냈다. 지구는 둥글고 둥근 것은 순환한다.
고체로 출발해 몸을 갈아낸 동그라미로 세계를 정화한 비누는 무위의 자연으로 돌아간다. 모난 돌이었던 나는 동그라미의 정기를 받아 점점 둥글어진다. 세상과 타협하며 때로는 흑과 백이 되고 어중간한 회색이 되기도 한다. 둥글게 사람을 껴안고 때로는 안기며 흙으로 돌아가리라.
부모가 되기 전에는 할 수 있다는 명제가 오롯했다. 생명을 낳고 양육하는 일이 얼마나 벅찬 과업인지 날이 갈수록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부족한 인간임을 절실한 날엔, 깨문 입술에서 핏물 같은 고백이 배어난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좌절하지만 내 부모가 그랬듯 알아주지 않아도 오물에 닿길 주저하지 않는다. 비누가 나의 부모님을, 부모인 나를 보여준다. 흙의 동그라미가 될 때까지 엄마의 역할은 가족을 끌어안고 정화해야 하리라.
과거의 부모님은 고체 비누였다. 요즘 신세대 부모는 물비누 같다. 무조건 희생하는 단단함에서 현재를 즐길 줄 아는 부드러움으로 진화했다. 뒤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지원하면서도 사랑을 숨긴 고체가 내 부모였다면, 액체인 요즘 부모는 손잡고 걷는 동행을 추구한다고나 할까. 몽글몽글 물 만난 물비누가 하늘 바다를 항해한다. 비눗방울이 보여주는 우주, 그 세계를 따라가는 아이의 걸음이 사뿐하다. 그 순수를 휘황하게 말아줄 셔터를 누르는 손은 누구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