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동무니와 뒷도 / 류영택
우리 집은 식구가 넷이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단출하지만 밥 먹는 시간도 제각각 다르고 귀가 시간도 들쭉날쭉하다. 일주일이 넘도록 아들과는 얼굴을 마주하지 못할 때도 있다.
모처럼 쉬는 날도 마찬가지다. 각자 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물 마시려고?” 어쩌다 정수기 앞에서 아이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기러기아빠가 된 같은 기분이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왠지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남들은 부자간에 고스톱도 친다는데." 아내는 그런 나를 자식들에게 너무 무관심하다며 나무란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평소 살갑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야 할 말이라도 있을 텐데. 말을 하고 싶어도 도시(都是) 이야기꺼리가 없다. 기껏 한다는 말이, 밥은 먹고 다니나. 공부는 잘하고 있나? 묻는 게 전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마음을 먹어보지만 함께할 마땅한 놀이가 없다. 나는 고스톱, 바둑, 장기, 잡기(雜技)에는 흥미도 없었을 뿐더러 할 줄도 모른다. 화투는 읽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을 모르는 암글이나 다름없고, 바둑은 오목을 두는 게 전부다. 그나마 장기는 어떻게 놓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어디에 재미를 붙이고 살았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 생각해낸 게 윷놀이다. 윷놀이도 근래에 내가 활동하고 있는 동아리모임에서 몇 번 해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싶지가 않을 것 같다. 컴퓨터오락에 빠져 있는 아이들이에게 윷놀이가 과연 먹혀들기나 할까 염려스럽다.
아니나 다를까. 윷놀이를 하자는 말에 아내와 아이들은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아빠, 광(光)이나 파시죠?" 평소 친구들에게 듣던 말을 아들한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차라리 개평을 뜯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고스톱을 못 치면 가족에게도 이런 대접을 받는가.' 나는 화를 내기보다 씽긋 웃음을 내놓는다.
"통닭내기하자." 내가 윷놀이에 재미를 붙인 것처럼, 하다보면 아이들도 놀이에 빠져들지나 않을까. 미끼를 던져보지만 싶게 걸려들지 않는다.
"어차피 아빠 돈으로 살 건데, 그냥 시켜먹으면 안돼요?"
"그리는 못한다."
“그럼, 딱 한판입니다.”
“그래도 통닭내긴데, 삼세판은 해야지.” 반 사정, 반 협박으로 윷판을 벌인다.
윷놀이는 도, 개, 걸, 윷, 모 다섯 끗으로 돼있다. 그리고 네 개의 말, 넉동이 나야 한판이 끝난다.
탁탁 바닥을 친다. 윷가락 네 짝이 가지런히 손에 잡혀온다. 쥘부채를 펴듯 윷을 감아 던진다. 손을 떠난 윷 중 하나가 담요 끝에 날을 세운다. 어느 쪽으로 넘어질 것인가. 잦혀지면 도가 되고 엎어지면 금 밖으로 굴러 떨어져 '낙'이 된다. 간절한 마음에 저절로 용이 쓰인다. 손바닥이 바닥을 향하고 등달아 몸도 기운다. 찰나의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아빠, 통 크게 노세요!" 뒷도에 넉동무니가 죽자 아들과 딸은 볼멘소리를 한다. "복불복이다." 헛기침을 해보지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다섯 끗에 웃음과 탄식을 내놓던 윷놀이에 언제부터인가 ''뒷도'라는 생소한 것이 생겨났다. 뒷도의 다른 말은 '빠꾸' 일본식 발음으로(back)뒤를 뜻하는 말이다. 누가 고안해냈는지. 뒷도는 농경사회에서 첨단시대로 급변한 지금의 현실을 잘 반영한 것 같다. 그동안 앞만 보고 내달리던 말에게는 길목에 매복해 있는 복병이나 다름없다.
뒷도는 윷가락 네 개 중 하나에 X로 표시해놓은 것이다. X가 그려진 윷이 도가 되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말이 오히려 뒤로 한 칸 물러서니 차라리 금 밖으로 ‘낙’을 한 것보다 못하다.
하지만 뒷도의 묘미는 그런 게 아니다. 뒤로 물러나는 그 한 칸이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말을 지름길로 갈 수 있게 방향을 돌려놓을 수도 있고, 넉동이 한데 어울러 뒤를 쫓아오는 '넉동무니' 상대의 말을 단번에 잡음으로서 지고 있던 판을 일순간 뒤집어 놓을 수도 있다. 뒷도는 인생역전 로또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덫이 될 수도 있다.
"아빠처럼, 너무 소심한 것도 탈이지만 급히 가려고 말위에 말을 얹는 것은 더 위험하다." 아이들을 향해 점잖게 타일러보지만 아무래도 말을 잘못한 것 같다. 아들은 또 다시 두 동을 얹는다. 자꾸만 서두려는 것을 보니 윷놀이에 빠져들기보다 통닭에 마음이 더 가는 모양이다.
"여보, 우리도 업어서 갑시다." 행여 추월을 당하지나 않을까. 마음이 급해진 아내가 재촉을 한다. 그래도 들어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내는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위험한 장사 마진도 좋지." 이기려면 승부를 걸어야한다며 지난 일을 들먹인다.
"이만큼 살게 된 게 누구 덕인데!" 눈알을 부라렸지만 소용이 없다. '모 아니면 도.' 이젠 자기식대로 하겠다며, 도, 개, 걸 아내는 손에 들고 있던 말을 앞 말에 포개놓는다. 저러다 잡히지나 않을까. 승부에 집착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내기에는 부모 자식도 없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성격이 말판에 그대로 드러난다.
말판을 가장 빠르게 돌아 나오려면 모 한 번에 걸 두 번 이면 된다. 하지만 생각대로 끗발이 나지 않는 게 윷이다. 그보다는 어떻게 말을 몰고 가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진다.
무리를 지어가는 말은 빠르긴 해도 복병을 만나면 전멸을 하고, 혼자 가는 말은 길은 더디지만 말 하나만 죽으면 된다. 나는 전술적으로 어느 것이 유리한가를 따지기보다 평소 내 성격대로 하는 편이다.
잡히지만 않으면 말을 얹고 가는 게 분명 빠르다. 그리고 넉동무니를 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삶도 마찬가지다. 말판의 말처럼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팔자를 고칠 일이 한두 번은 오기 마련이다. 오래 전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섬유공장을 하던 나는 밀려드는 물량을 감당할 수가 없어 공장을 키웠다. 물론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섬유업은 냄비와 같다. 조금만 경기가 좋으면 서로 베를 짜달라며 주문이 쇄도하고, 조그만 나쁘면 금세 물량이 끊긴다.
행여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넉동무니를 하고 가는 것처럼 마음이 긴장되고 불안했지만, 모험 없는 성공은 없다. 이번이 클 수 있는 기회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섬유경기는 곤두박질쳤다. 시간이 갈수록 제품단가는 내려가고, 그나마 물량을 구할 수 없어 베틀을 세우는 일이 잦아졌다. 몇 년은 끄떡없을 것이라 나름대로 판단했었는데 흐름을 잘못 읽었던 것이다. 더디더라도 차근차근 다져올랐더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뒷도에 넉동무니를 죽이고만 꼴이 되고 말았다.
윷놀이가 끝나고, 아내는 통닭을 먹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은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보다는 이긴 사람의 느긋함 같아 보인다.
"마누라 말 들으니 자다가도 떡이 생기죠?" 자신이 두 동을 얹는 바람에 이겼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것 같다.
"이기면 뭐하나, 주머닛돈이 쌈지 돈인데."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지만, '이게 행복이구나.' 내심 기분이 흐뭇해져온다.
비록 삼세판을 했을 뿐이지만, 나는 놀이를 통해 그동안 무심히 봐왔던 식구들의 성격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승패에 관계없이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백, 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넉동무니로 갈 것인가 각개약진으로 갈 것인가.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지, 더디게 간다고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언제까지 내가 가족의 울타리가 돼줄 수 있을지 장담 할 수도 없다. 그런대도 내가 넉동무니를 하지 않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다. '잘못되면 가족을 고생시킨다.' 만에 하나를 생각하는, 가장으로 살아오며 길들여진 습관일 뿐이다. 윷판에 드러눕는 윷가락의 모양새에 따라 말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처럼 인간사 새옹지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