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에 감꽃이 소리 없이 피었었다. 게으름뱅이 대추꽃도 헤싱헤싱 나타났었다. 그러더니 지난여름 무더위 속에서 주먹만 한 대봉시와 엄지손가락 마디만 한 대추들이 빼곡히 얼굴을 내밀었다. 땡볕을 받으면서 과일들은 알이 점점 굵어져 갔다.
초반에는 조용하더니 감들이 붉은 기를 내비치고 대추들이 환하게 웃기 시작하자 다람쥐들이 함께 나누어 먹자고 찾아왔다. 직박구리와 까마귀 떼들도 달콤한 냄새를 맡았는지 천연덕스럽게 감나무 가지에 앉아 용케도 잘 익은 것만 골라서 쪼아먹고 갔다.
과일은 우리에게 간식거리에 불과하지만, 다람쥐나 새들에게는 중요한 끼니가 될 것이다. 그래도 모든 새가 날아와서 쪼아먹는 것을 보니 내 것은 하나도 남을 것 같지 않았다.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스무 개 남짓한 감을 골라 봉투를 씌워주었다. 대추나무는 아래 한쪽으로 그물망을 덮어주어 그들과 내 영역을 구분하여 두었다.
마침내 가을이 우리 집 마당에도 찾아왔다. 홍시는 발갛게 익어갔다. 잘 익은 홍시는 몇 개 아이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 많던 대추는 익기도 전에 다람쥐와 새들이 따 먹고 겨우 한 대접 정도 내 차지가 되었다. 감나무가 홍시보다 붉은 단풍으로 치장하고, 대추나무는 황금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늦가을 폭우에 대추나무잎은 거반 떠나갔는데, 감나무 단풍은 물기를 머금고 더 예쁘게 매달려 있다. 가을볕을 좀 더 받고 싶어서 이별을 미루고 있는 것이리라.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과 매일 같이 찾아와 지저귀는 새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어디 그뿐이랴. 조그만 뒷마당이지만 철 따라 피고 지는 탱자꽃이나 로즈메리꽃이 내뿜어 주는 그윽한 향기는 얼마나 황홀한가. 꽃을 찾아서 부지런히 꿀을 빨고 다니는 꿀벌도 고맙다. 채소밭을 찾는 불청객 나비도 아름다운 날갯짓을 해주니 고맙다. 깊이를 알 수 없이 파란 하늘과 나른한 햇빛. 밤이면 초롱초롱한 별들이 불러주는 노랫소리도 고맙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요즘 카톡이 있어서 시도 때도 없이 친구나 주위 사람들의 근황이 게시되고 있다. 그래도 이 가을에는 오랫동안 적조했던 친구를 만나고 싶다. 얼굴을 맞대고 국화 향기를 맡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흉금 없이 나누어 보고 싶다. 심각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소일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건강은 어떤지, 잠시 멈추었던 우리 시간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다.
독립한 아이들이 자신들의 가정을 꾸리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세상 살다 보면 어디 쉬운 일만 있겠는가. 녹록하지 않은 삶을 당차게 맞이하며, 어려움이 있을 법도 한데 매사를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크게 보인다. 항상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들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언제 저렇게 의젓하게 커버렸을까.
딸아이네가 안부 전화를 해왔다. 이번 추수감사절 날 집에 와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식사를 함께하자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재롱이 한창인 손주들이 눈에 삼삼했는데 고마운 초대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준다면 연을 들고 가 손주들과 함께 공원에서 연을 날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연줄을 잡고 아장걸음으로 달리는 손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