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꽃과 팔려온 신부 / 손광성 

 

모란을 일러 부귀화富貴花라고도 하고, 화중왕花中王이라고도 한다. 크고 소담스러우며 여유와 품위를 지녀서이리라. "앉으면 작약, 서면 모란"이란 말도 있다. 이리 봐도 예쁘고 저리 봐도 예쁘다는 뜻이다. 화려하고 풍만한, 그래서 어느 오월의 신선한 아침에 보는 삼십 대 성장한 여인과 같은 꽃이다.

<양화소록>에 보면 모든 꽃을 아홉 등급으로 나누고 있는데 모란은 2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꽃에 등급을 매긴다는 것부터가 안 될 말이지만 더구나 2등급에 넣기에는 모란은 아까운 꽃이다. ​꽃에 국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꽃은 어떤 민족과 잘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모란은 가장 중국적이다. 그 크고 넓적함이 그렇고, 그 형태의 화려함이 그러하며, 또 농염한 색채가 그러하다. 서양 사람들은 장미를 사랑하고, 일본 사람들은 국화를 사랑하듯이, 중국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한다. 모란은 그만큼 중국적이다.

그 원산지가 또한 중국적이다. ​모란은 수나라 때부터 사랑을 받다가 당나라에 와서 유행했다. 궁중과 민가에서 다투어 심었는데, 신라에까지 <모란도>와 함께 씨앗이 전해질 정도였으니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아름답고 영민하기로 이름난 선덕여왕이 어렸을 때 이 <모란도>를 보고, "꽃은 아름다우나 벌과 나비가 없으니 필경 향기가 없겠구나." 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한데 모란에는 정말 향기가 없을까? 아니다. 있다. 선덕여왕의 말은 다만 애교 있는 실수였을지도 모르고, 씨를 심어 꽃이 피었는데, 정말 향기가 없더라는 말도 또한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향기를 말할 때, 유향幽香이라 함은 난초의 향기를 두고 하는 말이고, 암향暗香이라 함은 매화의 향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모란의 향기는 이향異香이라 한다. 향기가 좋으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은 굳이 따지지 않기로 한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시가 많다. 그 가운데 꽃과 여인과 사랑을 노래한 시를 뺀다면 몇이나 남을까. 그것들은 시의 영원한 소재요 주제다. 서구에는 장미를 노래한 시가 많다. 동양에는 모란을 노래한 시가 많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고려 때 ​예종은 모란을 애상해서 늘 신하들과 함께 이 꽃을 읊었고, 이규보는 우리나라에서 모란을 제일 많이 노래한 사람이다. 말하자면, '모란 시인'인 셈이다. <한림별곡> 여덟 장 가운데 꽃을 노래한 것이 다섯 번째 장인데, 모란이 제일 먼저 나온다.

조선시대의 시조 600수를 조사해 보았지만, 모란을 노래한 것은 단 두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에 비해 아치와 고절을 숭상한 것이 조선시대이고 보면 시조에 나오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 모를 일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모란보다 매화와 난을 더 사랑했다. 그러나 모란 시로 유명한 것은 역시 이백이었다. 그의 활달한 시 정신과 모란의 풍려함이 맞아떨어진 때문이리라.

어느 봄날이었다. 침향정沈香亭 앞에는 모란이 이슬을 머금은 채 활짝 피어 있었다. 난간에 기대앉은 양귀비와 그 어깨너머에 핀 모란을 번갈아 보고 있던 현종玄宗은 두 아름다움에 취해 있었다. 명창 이구년이 노래를 불렀지만 그러나 흥미를 잃은 뒤였다. ​

그래서 황제는 소리쳤다. "양귀비를 대하여 어찌 낡은 가사를 쓸까 보냐." 하여 즉시 이백을 불러들이게 했다. 어느 술집에 취해 있다가 창졸간에 잡혀온 그는, 그러나 거침없이 일필휘지一筆揮之하니, 세 편의 시가 경각頃刻에 이루어졌다. 그것이 유명한 <청평조사>이다.

 

어느 것이 귀비이고

어느 것이 모란인가.

임금의 입가엔 미소가 넘쳐,

못다 한 한恨이사 다시 있으리.

지금 沈香亭엔

한창 봄인 것을.

 

그러나 봄은 언제나 덧없는 것, 그 찬란하던 모란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듯이 이백도 양귀비도 모두 비명에 가고 만다. 비극이란 위대한 영웅과 아름다운 미인의 죽음이라고 한 사람이 있었다. 우미인虞美人은 초패왕을 위해 자결하고, 비연飛燕은 실연하여 죽고, 왕소군王昭軍은 오랑캐 땅에서 말라 죽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가는 미인인 수로부인水路夫人도 또한 같은 길을 걸은 것은 아닐까?

내가 아홉 살쯤 되었을 때였다. 이웃에 사는 중국 사람이 장가를 들었다. 신부는 고향인 중국에서 사 온다고 했다. 중국 사람들의 결혼식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몰려들었다. 나도 누님을 따라나섰다.

어른들 틈으로 본 신부는 매우 예뻤다. 경극京劇에 나오는 배우 같았다. 머리 장식과 화장이 매우 요란했지만, 분홍 치파오를 입은 채 이상한 향내를 풍기면서 무심히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옷자락 밑으로 뾰족이 내민 신발에는 그녀처럼 화사한 모란꽃 한 송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런데 손님을 맞은 신랑은 연신 웃음을 흘렸지만 신부는 조금도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팔려 왔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어린 나이에도 어쩐지 그 신부가 영 안됐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신부는 오래 살지 못했다. 결혼식은 초여름​이었는데, 장례식은 늦가을이었다고 기억된다.

모란을 볼 때마다 그 신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때문인지 더없이 화려한 꽃이지만 어딘가 낯설어 보이고,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픈 음영陰影 같은 것이 어려 있는 것만 같다. 지고 있는 모란을 보고 있으면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슬픈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요절을 보는 것 같아서 늘 마음이 아프다. 눈물이 많은 사람은 심지 말아야 할 꽃인가 한다.

환도還都 직후였다. 명동 중국 대사관 골목에는 그때만 해도 중국인 신발가게가 많았는데, 어느 가게에, 분홍색 공단貢緞에 불이 붙듯이 붉은 모란을 수놓은 꽃신 한 켤레가 제일 위쪽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가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요절한 신부 생각에 걸음을 멈추곤 했다. 사고 싶었지만 내게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만한 돈이 있는 지금은 신발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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