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가지 문학 이야기 / 양영길 (시인, 평론가)


문학,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모든 살아가는 이치가 그렇듯이 문학도 쉬운 것과 어려운 것, 재미있는 것과 딱딱한 것이 있다. 문학을 어렵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선입견일 뿐이다. 문학은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들의 생활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는 TV의 드라마, 음악과 노래, 스포츠, 광고, 오락물 등에도 여러 문학적 요소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간판, 표어, 현수막 등에서도, 또 우리가 매일 보는 신문 지면의 기사나 한 컷의 만평에서도 문학적 표현들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선인들의 지혜가 담긴 속담이나, 또 요즘 학생들이 즐겨 쓰는 변말(은어)에도 문학적 표현들이 숨 쉬고 있다. 문학은 글로 쓴 것만이 아니라 입말로 전해지는 것도 있다. 설화나 민요가 그 예이지만 오늘날에도 감동적인 이야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우리들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의 말을 듣고 거기에 감동하여 그 이야기에 가슴 뭉클하거나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한다면 그 이야기는 분명 아름다운 문학임에 틀림없다.


문학은 우리들의 일상 깊숙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들은 문학의 한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들은 코와 입으로 대기 중의 산소를 호흡하면서 살아가고 있듯이 눈과 귀로는 역사와 문화를 호흡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은 우리들을 좀 따분하게 만든다. 지금껏 문학을 학교 시험이나 대입 수능을 위한 수단으로 대해 왔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시집이나 대중소설을 읽는 것을 한가한 사람의 소일거리쯤으로 생각하는 편견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시험 때문에 문학을 대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문학을 향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에 얽매여 있었다고나 할까. 문학을 진정 사랑하고자 한다면 이런 ‘얽매임’에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음악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더라도 노래를 즐겨 듣고 부르듯이.


그래서일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마주하면 보통 사람들은 당혹할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혹 대답을 했다고 해도 그 대답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그만큼 문학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서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려운 것이다.


사실 ‘학(學)’자가 붙어 다니는 것들은 좀 어렵다. 수학, 과학, 철학. 이런 것들은 이름만 들어도 머리 아프게 하지 않는가. 역사보다 역사학이 어렵고 도덕이나 윤리보다 철학이 더 어렵다. ‘좋아하는 시’라거나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말보다 ‘문학’이 더 딱딱할 것 같고 어렵게 생각된다.


이런 ‘학’자가 붙어 다니는 것들은 인류의 역사상 최근에 이론화된 것들이다.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생활과 그 터전인 사회와 문화, 그리고 자연 속에 넓고 깊게 자리 잡고 있던 것을 체계화하여 학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려워졌다고나 할까.


또 ‘학(學)’자가 붙어 다니는 것에는 외우기도 힘든 서양 사람의 이름들이 곧잘 나온다. 심리학 하면 프로이트나 융, 철학하면 플라톤이나 하이데거, 역사학 하면 카아나 토인비, 과학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코페르니쿠스 등이 나온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 엘리엇, 리처즈, 말라르메, 쉬클로프스키, 데리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학’ 자가 나오는 곳에 우리 한국 사람의 친숙한 이름들이 들어설 곳은 아무리 뒤져봐도 없는 것 같다. 또 여기에는 ‘주의(ism)’가 잘 붙는다. 문학의 경우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등 낯설기 그지없는 이론과 서양 사람의 이름들만 잔뜩 들먹인다. 이런 현상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보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


설령 우리가 코페르니쿠스를 배웠다 하더라도 시험이 끝나고 나면 몰라도 그만이다. 마찬가지로 문학도 시험이 끝나고 나면 잊어버려도 그만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활 속에 과학적 사고가 깊게 관여하고 있듯이 우리들의 정서 속에는 문학적 인식과 그 표현이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숨쉬고숨 쉬고 있다. 문학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자들에게도, 이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 보겠다고 외쳐 대는 정치가들에게도 문학적 정서는 숨 쉬고 있다. 문학적 정서는 사회와 역사의 대기 중에 폭넓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도 이러한 문학적 정서를 눈과 귀와 마음으로 호흡하면서 사회와 역사를 공유하는 민족 공동체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의 모습도 문학적 전략에 의해서 이야기되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을 수 있는 문학 작품이 될 수 있다. 문학을 다루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소중하고 애틋한 삶의 이야기의 일부를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이것을 특수화하기도 하고, 특수성을 지니면서도 보편성을 지니는 것으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렇게 독자와 만나는 문학 작품 속에는 특수성과 보편성이 함께 숨쉬고 있다.

일상인의 문학 세계가 따로 있다

문학을 산에 오르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전문 산악인만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가롭게 산에 오르며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는 의미이다.


산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험해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쳐다보기만 할 뿐 오를 엄두도 못내는 산이 있는가 하면, 잠시 시간을 내어 가까운 사람끼리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오를 수 있는 산도 있다. 또한 산은 그 모습이 변화무쌍하다.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의 모습이 다르고 어제 올랐던 산과 오늘 오르는 산의 모습이 달라지기도 한다. 또 선글라스를 쓰고 바라보는 모습이 다르고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모습이 다르다. 흐린 날은 흐린 날 대로, 맑은 날은 맑은 날 대로, 비 올 때와 비 갠 뒤의 모습이 각각 다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을 맞이할지 산을 올라 보지 않으면 말로써는 표현하기 어렵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전문적인 사람들의 문학 세계가 있고 일상인의 문학 세계가 따로 있다. 유명한 서양 사람들이나 권위 있는 대학 교수들의 이론이 없어도 문학은 우리들 주변에 엄연히 숨 쉬고 있다. 그래서 문학 이론을 두고 회색빛 이론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도 있다.


이론을 아는 사람만이 문학을 아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학은 들과 산을 즐겨 찾는 사람들에게는 산과 들에 피어나는 무수한 들꽃이기도 하고,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붉게 익어 가는 감나무의 열매이기도 하다. 또한 문학은 우리들이 열심히 일하는 현장이기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여유의 시간이기도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하는 눈짓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은유’니 ‘역설’이니 ‘낯설게 하기’니 하는 어려운 말들을 잘 몰라도 우리의 삶과 생활 속에서 몸소 문학을 체험하면서 울고 웃고 설레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여러 문학 이론이나 학자들을 모르면서도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마음껏 문학을 즐기고 있다.

문학적 물음이란 무엇인가

어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풍년을 기약하는 <꽃요람굿>이 전해지는 평안도 영변을 무대로 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가르칠 때였다. 이 시에서는  ‘이별이 이루어진 상황이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냐?’라는 내용으로 토론을 하고 있었다. 한참 토론이 진행되어 어느 정도 결론이 나올 무렵이었다. 한 학생이 “선생님! 이런 것도 시험에 나옵니까?”라고 물었다.


우리들은 문학을 왜 필요로 하는가. 물론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학교 교육 내용이 모두 시험만을 위한 것이라면 삭막해서 어디 세상 살 맛이 있겠는가. 인생살이 모두가 경쟁과 시험이라고 치더라도 시험으로부터 박차고 나와 밖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시험도 잘 치르고 살만한 세상을 가꿀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보다 훨씬 어렵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거나 “인생은 바둑판과 같다.”라고 해도 그것을 틀렸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생학>이라는 과목은 교육과정 속에 개설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은 국어 교과 과정 속에 엄연히 존재하여 많은 시간 동안 배우고 익혀 시험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만약 이 물음에 “문학은 일터와 같다.”라거나 “문학은 바다와 같다.”라고 대답하면 너무 생소하여 난해하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국어 교과 과정에서 “문학은 언어 예술이다.”라거나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의 한 분야이다.”라는 식으로 배워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만으로 문학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문학을 여행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나는’을 내세우면 “왜?”라는 반문을 이끌어 내게 되어 그 설명이 쉬워진다. 문학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물음과 대답이 아닌, 주관적 판단에 해당하는 물음과 대답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문학은 개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주관적인 것이다.


문학은 시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우리들 자신을 향한 물음이다. 여기서의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서적 반향은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개인적 물음이기도 하고, ‘우리의 역사는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내가 살고 있는 생태 환경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와 같이 개인을 확장한 공동체적 물음이기도 하다.


이러한 물음과 대답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쌓인다면 개인적 성숙을 도모하고, 나아가 아름다운 공동체를 가꾸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물음은 바로 ‘나’를 향한 물음이며, 그 메아리는 ‘우리’들을 향한 울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시를 읽을 때에는 천천히 상상하면서 읽고 또 거듭 읽어서 그 정서와 리듬을 함께 호흡하여 체득할 수 있어야 한다. 소설의 경우도 부분을 음미하고, 다시 부분 속에서 전체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은 '나'를 중심축으로 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재해석하고 변용시켜 나가면서 우리들의 삶의 무게를 감당해 내는 것이다.


우리들은 각종 대중매체의 눈부신 발달로 무궁무진한 세계들을 경험하고 있다. TV나 컴퓨터가 한 권의 책보다 더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 영상적인 유혹을 물리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아니, 영상물에 중독되어 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 같다. 문자를 통한 해석과 이해는 공부하고 연구하는 방법일 뿐이며, 일상 속에서는 영상을 통해서 무차별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이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서적 불균형과 정서적 무감각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에는 TV나 비디오, 컴퓨터 등으로는 채울 수 없는 지적 욕구와 정신적 가치가 담겨 있다. 문학은 인간의 정신적 욕구를 채우는 데 적절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TV나 영화를 보고 거기에 몰두하는 시간을 뒤돌아보라.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겼던 시간보다 얼마나 짧고 허전한가. 영화나 문학에는 놀람과 충격에 따른 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소화하는 데 있어 영화는 쫓아가느라 얼이 빠져 있지만 문학 작품은 잠시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정신적 성숙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문학과 영화는 그 차원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문학 이론의 두 얼굴

야구, 축구, 농구 등의 운동 경기를 구경하는데 그 규칙과 작전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 그 경기를 더 재미있게 구경할 수 있다.(운동 경기에서는 어느 한 쪽을 응원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 작전이니 규칙이니 이런 것과 관계없이 열광하면서 즐길 수도 있다.) 운동 경기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즐기고자 하는 그 무엇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게 되면 더 재미있게 보고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많이 알면 재미없는 것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이 그것이다. 촬영 기법, 편집 기법이나 속임수인 트릭을 전부 알아 버리면 무슨 재미로 영화를 본단 말인가. 보통 사람들이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몰두와 긴장의 맛에 흠뻑 빠져들고 있을 때, 영화 평론가처럼 의무감 때문에 졸린 눈을 비벼 가면서 봐야만 하는 고역으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학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한 편의 시나 소설을 읽어도 보통 사람들이 즐기는 보통의 즐거움을 모른 채 이론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리거나 깔깔대며 웃는 것이 더없이 부러울 때가 있다. 전문가들 스스로 파 놓은 함정이라고나 할까. 집착과 애증의 짝사랑이라고나 할까.


이론을 알면 시험은 잘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험을 잘 치른다는 것과 시나 소설을 잘 쓴다는 것이나 문학을 즐긴다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문학은 논리적 사고 이외에 정서적 반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먼저 나왔을까. 아니면 이를 위한 문학 이론이 먼저 나왔을까. 당연히 문학이 먼저 나왔고 이를 체계화하기 위한 이론이 나중에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론의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문학이 문학 이론에 의해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무시당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외면과 무시를 받는 것들이 올바로 인식되고 발전될 수 없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론가들이 외면한 것들은 그 가치가 없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 가치는 그 이론가들의 방법에 의해서만 무시된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문학 이론 밖에서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것들을 찾아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여 문학적으로 다듬어 나가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의 문학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문학 이론은 그 동안의 문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된 것일 뿐이다. 문학 이론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쓴 작품들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쓰는 작품은 문학 이론을 알고 이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읽을 만한 작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문학 이론은 문학 작품을 읽고 쓸 때 기초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는 '재발견', '재창조'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문학 이론은 다만 참고 사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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