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큰딸이 샌프란시스코 본사에서 다운타운에 있는 지사로 출장을 왔다. 출장 중 회사 근처에 머물 수 있는 아파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동안 엄마, 아빠와 퇴근 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집에서 30마일 이상 떨어진 거리라 출퇴근에 왕복 3시간 이상 걸렸지만, 딸이 함께 있고자 하는 마음이 기뻤다.
이번 주에는 작은 딸네 가족도 주말에 친정에 왔다. 오클랜드에서 내려온 작은딸 가족과 금요일 저녁 동네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큰사위도 함께해 온 가족이 모여 즐거웠다. 큰딸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추어 LA 코리아타운 동쪽에 있는 콜리마와 노갈리스의 ‘감자골’ 식당을 예약했다. 감자탕, 돼지 보쌈, 된장찌개, 떡볶이와 함께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만든 폭탄주로 건배하며 오랜만에 한식을 즐겼다.
지난해 여름, 열한 살 된 손녀의 여름방학 때 부모와 함께 처음으로 한국을 다녀왔다. 손녀는 한국 바라기가 되어 된장찌개와 떡볶이를 먹겠다고 좋아하며, 식당의 물병이 한국에서 봤던 것이라고 박수를 쳤다. 식당 벽에 장식된 한옥 사진과 장독대를 보며 경주에서 증조할머니가 살던 집 같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당시 한국 여행에서는 손녀가 전통 가옥을 경험하도록 경주의 한옥에서 며칠을 묵었다. 손녀는 부모와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한국이 가장 좋았다며 다시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7학년 여름방학에 다시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이민 초기, 큰딸을 유치원에 입학시켰을 때 세계 지도에 대한민국은 작게 그려져 있고, Korea라는 이름조차 없던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이 있다. 반면, 일본 지도는 고국보다 몇 배 크게 그려져 있었고, ‘Japan’이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이 황당한 경험 이후 나는 딸들에게 한국인의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한식을 주로 먹이며 딸들이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면 쌀밥과 불고기, 김치를 내주었다. 딸들은 내 방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 한국 문화를 자랑스러워했다. 이민 초기, 한국이라는 이름조차 지도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던 현실은 충격적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아이들에게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사위들도 장가들기 전부터 한식을 먹어보게 했고, 신혼 시절에는 김치 담그는 법까지 배우러 왔다. 배추를 사고, 김치를 담그는 모든 과정을 스마트폰으로 친구들에게 중계하며 자랑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사위와 사돈들은 한국인 배우자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 말하며, 내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즐긴다. “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시는 음식이 이렇게 정성이 담긴 줄 몰랐다”라며 한국 음식을 통해 전해지는 따뜻함에 감동을 표현했다.
오늘날 K-문화가 세계를 휩쓰는 모습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5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K-문학, K-팝, K-푸드,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당시 작은 나라로 여겨졌던 한국이 이제는 문화 강국으로 자리 잡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격스럽다. 이는 한국인의 부지런함과 교육의 힘, 그리고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동포들의 노력 덕분이다. 조용히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헌신이 모국의 발전으로 이어졌음을 생각하면 자랑스러움과 감사의 마음이 깊이 느껴진다.
<권조앤 오렌지 글사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