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발상(發想)

- 나의 별 하나를 찾는 것  /최원현

1. 발상의 동기

최근 들어 수필에 대한 문학 장르적 위상 및 이해도가 많이 높아진 것 같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으레 수필집이 올라가는 것도 수필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가 상당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런 수필집을 접하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글로 많은 독자는 확보하고 있다 하더라도 웬지 아쉬움을 느낌은 분명히 들어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빠진 것 같아서이다. 수필의 문학성, 그리고 수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생각되기 때문이다.

장백일은 '수필이란 언어로써 마음을 나타내는 한 폭의 수필화(隨筆畵)'로 '진정한 수필가는 자기 양심을 통해 소재의 진실과 진리를 드러낸다'고 했다. 특히 수필의 문학성에서 강조하는 감동은 소재에서부터 진통하고 고뇌하면서여과된 감동이며 언어예술을 통하여 소재의 진실성을 감동으로 자각시키는 인간학이라고 말한다.

많이 팔려서 많이 읽혀지는 수필이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많은 전문 수필작가들이 스스로도 만족할만한 작품을 쉽게 얻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수필이 쉽게 씌여지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궁극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이다. 그중에서도 수필은 자기의 이야기다. 그래서 수필은 자기의 체험과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의 느낌과 의미를 현실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 체험과 진실은 읽는 이에게 공감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수필의 생명으로서 '작가와 독자의 수필 속 여행' 곧 쓴 이와 읽는 이가 함께 하는 체험여행을 공감의 감동으로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한 편의 수필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소우주를 개척하는 일이다. 그 우주 속엔 인간의 모든 감정과 희망과 과거 현재 미래가 들어 있다. 소설도 못 쓰겠고, 시도 못 쓰겠으니까 수필을 쓴다는 것이 아니라, 소설로도 말할 수 없는 것, 시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수필이다. 다시 말해서 수필(隨筆)이란 작자가 인간이나 사물 앞에서 근본적으로 애정을 갖는 표현으로서 이 애정을 어떻게 느끼고 수용하고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 수필쓰기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수필에서의 발상은 이러한 수필쓰기의 발상(發想)-내가 찾는 별 하나를 찾는 것-이다. 선택하고 의미를 주어 생명이 있게 하는 일이다.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여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싹을 보며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끼고, 꽃에서 아름다움과 향기를 보며, 열매에서 충만한 맛을 느끼려면 씨앗이 좋아야 한다. 씨앗이라는 겉모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속으로부터 자라나 피워낼 꽃과 열매를 보아야 한다. 발상은 씨앗 속에 숨어있는 잎과 꽃과 열매를 미리 보는 일이다.

2. 발상을 위한 전제조건

한 편의 수필을 낳기 위한 배란(排卵)을 우리는 수필의 착상, 구상(構想) 또는 발상(發想)이라고 한다. 발상은 수필쓰기의 시작이지만 한 편의 수필이 수필로서 완성되게 하는 명시적인 설계도 이전의 머릿속 설계도다. 세밀한 구성이라기보다는 완성 후의 상상그림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상상그림은 건축으로 본다면 단순한 집만이 아니라 그 집과 관계되는 주위 환경까지 고려되어야 한다. 정원에 놓는 돌멩이 하나, 화초 한 포기까지도 집의 분위기, 곧 내가 짓고자하는 내 집의 이미지를 조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상상그림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집엘 갔다가 현관 앞에 놓여진 작은 수석 하나를 보고는 저것보다 백 배쯤 큰 것을 정원에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순간적 생각으로부터 내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너무나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저렇게 하늘이 탁 트인 곳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그런 순간적 바람으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한 편의 수필은 이처럼 여러 형태의 발상이란 과정을 거쳐 태동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필을 위한 발상은 자연발생적일 수도 있지만 당장 한 편의 수필을 써야 하는 목표를 앞에 놓고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런 순간적 발상이 바로 수필로 이어져 완성된다면 가장 자연스런 한 편의 수필이 될 것이다. 그런 행운이란 쉽지 않은 법, 의도적 글쓰기가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기에 거기에 꼭 맞는 글감을 찾는 수필적 발상은 그만큼 고통과 인내가 수반될 수도 있으며, 따라서 바른 발상을 위해서는 몇가지 생각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먼저 수필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쓰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필요하다.
한 편의 수필다운 수필을 쓰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수필에 대한 분명한 이해 곧 수필문학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부터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의 영문학자 '도가와(戶川秋骨)'가 '수필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 특색을 띄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듯이 수필은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 사람만의 독특한 인격적 특색이 있어야만 좋은 수필이 될 수 있다.
수필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건축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는 사람이 집을 짓는 것 같아 자칫하면 수필이라 하지만 신변잡기나 자기 혼자만 보는 일기문의 범주를 넘어서기 어렵게 된다. 


*다음은 소재(글감들)에 대한 애정이다. 

매양 보는 것일지라도 애정을 갖고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이다. 수필의 시작은 바로 글감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어떻게 애정을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수필감이다' 하고 느껴지는 것도 있을 수 있으나, 글을 쓰는 사람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은 항상 글을 쓰고자 하는 동기 발현이 되어 있다는 점이고, 그럴 때 보이는 모든 것, 느껴지는 모든 것에 남다른 애정을 부여하다 보면 그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마음에 다가오는 것이 글감으로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집의 개다리 소반은 이젠 돌아가신 지 여러 해 된 내 외할머니의 유품이어서 그리움의 창이 된다. 어쩌면 할머니께서는 이 볼품없는 개다리 소반을 통해 늘 가까이서 나와 나의 아이들에게 남아있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렇게 가슴에 남아 촉촉하게 내리는 이슬같은 것인가 보다. 내가 상을 차려 아이들과 함께 둘러 앉게 되면 모락모락 오르는 김 속에 할머니의 미소가 피어 오를 것만 같다.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중에 실려있는 '그리움 열기'란 내 수필의 한 부분이다. 지금은 대학생이 되어있는 작은아이가 앉혀 놓으면 겨우 앉을 수 있을 때쯤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께서 다리가 개다리 같은 소반 하나를 사오셨다. 앉혀놓은 아이가 균형을 제대로 못잡고 힘없이 넘어지는 것을 보시곤 아이가 붙들고 앉아 놀기도 하고 또 그 위에 놀거리를 올려놔 주면 잘 놀 수도 있을 것이라며 주고 가신 것이다.
이런 작고 둥근 상 하나쯤 없는 집은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물건으로만 보인 것이 아니라 할머니께서 나와 그리고 내 아이에게 주시는 사랑이라고 보았을 때 그것은 단순한 물건의 차원을 넘어 많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개다리 소반은 그렇게 아이를 중심으로 존재하면서 내게선 늘 할머니를 느끼게 했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언제까지고 개다리 소반을 통해 우리와 함께 살고싶어 하신 할머니의 사랑을 느끼게까지 된 것이다. 이처럼 수필은 자기와 관련된 사물이나 사건이 작자로부터 애정을 부여받음으로써 작자의 마음 속에서 수필의 씨가 되어 발아(發芽)하게 되는데, 이러한 애정부여가 스파크를 일으키게 되면 전율처럼 수필감이다 하는 감(感)이 오고, 그 느낌의 포착이 발상이 되어야 한다.

*또 하나, 글감들이 주는 메시지 곧 발신음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애정을 주기 전에는 보이지도 않던 것들이 애정을 주게 되면서 저마다의 특색있는 모습들로 보이기 마련인데 그것들을 단순히 보이는 것들로만 보지 말고 그들마다 내는 독특한 소리, 빛깔, 모양을 작가의 촉각으로 듣고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귀, 눈, 생각의 안테나로 발신되는 정보들을 받아 가슴으로 안아서 그것들이 그 가슴속에서 따뜻하거나 차갑게 되어 느껴지는 떠오름이 수필감 곧 발상이 되어야 한다.
수필의 씨앗은 가슴에서만 발아(發芽)된다 할 수 있다. 수필가라는 작가의 가슴이 너무 얼어 있거나 척박하여도 싹이 틀 수 없고, 물이 많아 습하면 씨앗이 그냥 썩어버린다. 너무 지적(知的) 자양분이 넘쳐도 이파리만 무성할 뿐 꽃도 열매도 향기도 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수필은 쓰는 것이기보다 '낳는다'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열 달 동안을 엄마의 뱃속에서 충분한 자양분을 받아 튼실한 모습을 갖춘 뒤 세상으로 나오는 아기처럼 수필 또한 그렇지 않으면 아니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