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자귀나무 꽃

鄭 木 日

 

칠월이면 계절은 어느새 성숙과 성장의 호르몬이 자르르 흐르고 얼굴엔 청년의 열기로 가득 차있다. 뜨거운 뙤약볕에 만물이 축 늘어져 맥을 못 추는 여름철엔 꽃들도 눈길을 받기 어렵다.

무덥고 답답하기조차 한 농촌의 여름, 어느새 초록빛으로 변해버린 산야에 눈을 황홀하게 해주는 꽃이 있다. 나뭇가지에 분홍빛 깃털로 만든 작은 우산을 펼친 듯한 꽃들이 초롱처럼 매달려 있다. 나른한 여름 한낮에, 속눈썹이 긴 소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듯한 신비로운 꽃과 대면할 수 있음은 큰 기쁨이다. 자귀 꽃을 바라보면 사춘기 때 소녀와 눈 맞춤 하던 순간이 되고 만다. 나이도 잊어버리고 분홍빛 연정이 물들어 옴을 느낀다. 속눈썹이 이마에 닿아오는 듯하고 눈동자는 물 오른 속삭임으로 깜박거린다.

 

자귀 꽃은 생김새가 퍽 이색적이다. 꽃받침과 화관은 얕게 5개로 갈라지고 녹색이 돌지만, 수술은 길게 밖으로 뻗어나 분홍색을 띈다. 자귀나무 꽃이 분홍색으로 보이는 것은 수술의 빛깔 때문이다. 여느 꽃들에선 꽃의 빛깔이 뚜렷하지만 자귀나무 꽃은 수십 개의 수술이 모여 분홍빛깔을 이루기 때문에 투명한 분홍이고 빛이 투과하여 빛을 뿜어내는 듯하다. 나무 한 그루에 수 천 개 분홍 촛불을 켜놓은 듯하다. 호주에서 붉은 빛 우산을 펼쳐놓은 듯한 불꽃나무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는데, 자귀나무 꽃보다 정열적이긴 하였으나 신비롭지는 않았다.

 

수많은 꽃들이 있지만, 자귀나무 꽃처럼 신기로운 꽃도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 산야에 이처럼 황홀하고 눈부신 꽃이 있다는 걸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다. 자귀 꽃은 섬세하고 부드럽다. 수십 개의 분홍 수술로 우산처럼 펼쳐진 꽃은 가장 섬세하고 부드러운 비단실로 만든 듯하다. 강렬한 여름의 뙤약볕이 아니라, 다사롭고 은근하며 무언지 속삭여줄 듯한 햇살의 감촉이다. 꽃의 빛깔과 향기는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고 은은하다. 자귀 꽃은 처음으로 얼굴에 크림을 발라 본 열여섯 살 소녀의 살 내음을 풍긴다. 꽃을 코에 갖다 대면 상큼하고 은근하며 부드럽고 깊은 맛이 있다. 아마도 순수와 밝음에서 풍겨오는 향기일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아련한 그리움의 향기를 띄고 있다.

 

자귀 꽃은 밤이면 조용히 꽃잎을 오므려버린다. 꽃의 분홍빛 수술은 분을 바르는 붓털보다 더 부드럽고 섬세하다. 미세한 마음의 감촉까지도 느껴져 온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섬세한 꽃은 자귀 꽃이 아닐까 한다.

모두가 지쳐서 숨을 몰아쉬는 한 여름에 자귀 꽃이 피어 이토록 부드러움과 신비로움을 선물해주고 있음은 여름의 경이가 아닐 수 없다.

 

이룰 수 없는 꿈이 될지 알 수 없어도 정원이 있는 집을 갖게 된다면, 자귀 꽃을 맞아들이고 싶다. 자귀 꽃으로 무더운 여름을 가장 부드럽고 은은한 빛깔과 향기로 채우고 싶다. 삶이 새로워지고 순수에의 설렘이 생기고 아름다운 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싶다. 분홍빛 촛불들을 나무 가지마다 초롱초롱 매달아 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