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 문희봉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 우산, 깜장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 길에 우산 세 개가….” 어린 시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오늘 입안에서 리듬을 탄다. 언제 들어도 좋은 가락이다. 이 가락과 함께 하는 시간 나는 내가 자라던 고향마을로 달려가는 영광을 안는다. 부모님의 모습이 보이고, 고향마을이 보이고, 친구들이 보인다. 버드나무 높다란 가지 끝에 견고하게 지어졌던 뭇새들의 보금자리도 보인다.
태풍이 몰아친 엊그제 낮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이었다. 40대 경찰관이 휠체어를 탄 30대 남자 장애인에게 한 시간 동안 우산을 받쳐줬다. 이 장애인은 오전부터 비를 맞으며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중증 장애인에게도 기본권을 보장해 달라.”는 피켓을 든 채였다. 경찰관은 “오늘은 태풍 때문에 위험하니 이만 들어가고 다음에 나오시는 게 어떠냐.”고 했다. 장애인은 “오늘은 내가 (시위)담당이라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몸이 불편해 우산도 들 수 없었다. 경찰관은 아무 말 없이 자기 우산을 펴 들었다. 얼마나 정겨운 모습이었던지.
그보다 더 오랜 날, 일본 대사관 앞에서 40대 경찰관이 위안부 소녀상에 우산을 씌워주는 사진이 사람들 마음을 적셨다. 젊은 나이에 성노리개로 몸을 망가뜨렸던 분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동상이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젊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분들을 위한 동상이 비를 맞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지금도 고통을 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뻔뻔스런 얼굴을 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그래서 동상이라도 세워 그분들의 아픔을 위로해 주고자 했던 것이다. 경찰관이 아닌 일반인이 우산을 씌워주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10여 년 전 서울에서 근무한 험프리 영국 대사는 초저녁 정동 길을 산책하다 소나기를 만났다. 그때 말없이 우산을 건네준 젊은 남녀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관저에서 불과 10분 거리였지만 우신도 없고 비를 피할 데도 없었다. 젊은 커플은 각기 우산을 갖고 있었고, 그중 하나를 선뜻 내주고 사라졌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한국인이라는 사실만 알 뿐이다. 영국 대사의 뇌리에 한국인이 어떠한 인물로 각인괴어 있을까.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심한 대우를 해 한국의 인상에 먹칠을 하는 사람들과 대조가 된다. 하찮은 우산 하나가 만들어낸 엄청난 효과가 아닌가.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우산이 흔하지 않았다. 우산이라야 지(紙)우산이 다수였다. 종이에 기름을 먹인 것으로 우산살도 대나무였다. 조금 센바람에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우산이었다. 이 지우산에서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날 아침엔 맑았는데 오후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장에 오셨던 아버지는 자식 걱정이 되어 친구들과의 막걸리 자리도 물리친 채 우산을 사들고 학교로 찾아오셨다. 아들이 공부하는 교실을 찾아 복도에서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의 얼굴은 기쁨으로 도배되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순간 내 눈엔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앞을 가려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여느 때 같으면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이나 되어서야 집으로 향하시던 아버지였지 않던가. 그날 아버지의 왼손에 들려 있는 꽁치의 비릿한 냄새도 역겹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가지고 오셨던 노랑 지우산이 지금도 내 손에 들려 있는 듯하다.
우산은 혼자 쓰면 겨우 비를 가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남에게 건네면 아름다운 감동을 연출하는 물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