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건 어울려 피는데…
결혼이주 베트남 '孝婦'까지 놀리고 下待하는 우리들 모습
다름을 인정하고 보듬으라는 사랑의 진리 꽃에서 배웠으면

이은희 수필가 사진이은희 수필가

단비가 오달지게 내린 날이었다. 아파트 경비실 쪽으로 달려갔다. 혹여 간밤에 내린 비에 섭슬렸을까 녀석의 안부가 궁금해서였다. 화단 귀퉁이에 오종종 피어 나의 오감(五感)을 일깨운 들꽃이었다. 비를 머금은 제비꽃은 참으로 청초했다. 물기로 꽃잎의 빛깔은 더욱 곱고 찬란했다.

제비꽃은 도통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대부분 양지바른 곳 척박한 땅에 피는 들꽃이다. 햇빛과 흙이 있으면 잘 자란다. 척박한 도로 경계석 돌 틈과 절벽 틈새에서도 자라니 생명력이 강한 꽃이다. 나의 눈을 사로잡은 들꽃은 그나마 보금자리가 좋은 편이었다. 얼마 전 경비원이 잔디밭을 가꾸다 군락(群落)을 이룬 제비꽃을 모두 뽑아버리기가 아쉬워 화단에 옮겨 심은 것이었다.

개체 수가 많은 꽃 중의 하나가 제비꽃이다. 지천으로 깔린 보랏빛 제비꽃 외에도 해발 500m 약간 높은 곳에서 자라는 노랑제비꽃, 흰 꽃에 이파리가 갈라진 남산제비꽃, 산과 들의 습기가 있는 땅에서 자라는 콩제비꽃, 잎이 초승달 모양인 반달콩제비꽃, 꽃과 이파리의 색깔이 비슷한 녹색남산제비꽃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제비꽃이 60여 종이 넘어 모두 열거할 순 없지만 녀석들은 종족을 보존하고자 교잡종(交雜種)이 쉽게 일어난다. 그리 보면 제비꽃은 언제 어디서나 화합하길 좋아한다. 그 빛깔과 모습이 바뀌어도 개의치 않는 듯싶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는 마치 그 제비꽃처럼 나이와 국경에 관계없이 남녀가 결혼하는 것으로 결혼관이 바뀌고 있다. 내 주위에도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동료가 여럿이다. 나라 간 문화 차이를 잘 극복하고 살아가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주위에서 그들을 받아주질 않아 힘겨워하는 가정도 있다. 베트남 사업부로 파견된 40대 중반의 노총각은 그곳 여성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다. 아내는 시어머니가 아프셔서 아이를 데리고 먼저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자기 부모처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다. 얼마 전에는 이웃의 추천으로 '자랑스러운 효부상(孝婦賞)'도 받았다. 1년 뒤에는 남편도 귀국하여 온전한 가정을 꾸리게 됐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런데 그 집 아이가 입학하면서 문화적 차이로 고통을 겪게 됐다. 같은 반 아이들이 엄마의 얼굴 생김새를 가지고 놀린다는 것이다. 아이는 학교에 엄마가 오는 걸 꺼려 바쁜 중에도 아빠가 직접 학교를 찾는단다. 어디 그뿐이랴. 다문화 가정에서 문제점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내가 후진국 사람이라고 아래로 보는 경향과 남편의 가부장적 태도란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적대시하고 사람 위에 군림을 하려는지. 참으로 시대적 착오를 크게 범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진 속 녹색남산제비꽃이 우리에게 너희 사랑은 고작 그 정도냐고 조롱하는 듯하다. 인간은 왜 제비꽃처럼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해와 배려는커녕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아내가 모든 걸 자신에게 맞추길 원하는가. 녹색남산제비꽃도 처음엔 남산제비꽃으로 태어났다. 이어 주변에 함께 자라던 다른 모습의 제비꽃과 사랑을 나누게 됐다. 사랑이 깊어진 제비꽃은 2년 뒤에 꽃의 색깔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녹색의 한 빛깔과 한 몸으로 거듭난 것이다. 제비꽃의 생태 변화가 눈앞에 바로 그려지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많은 시간을 서로 보듬으며 새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작은 들꽃의 섭리에서 사랑의 진리를 깨우친다. 동료 부부도 환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 아내가 우리와 다른 모습이라 낯설지라도 이웃은 적어도 서로에 대하여 알아보려는 노력과 최소한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지구촌(地球村)'이란 단어가 실감이 나는 시대다. 방금 일어난 사건이 실시간으로 전파되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소식을 접한다. 시·공간적 틈새가 좁혀질 대로 좁혀진 세계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그 시차가 점점 더 좁혀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어떤 나라에선 인종차별로 총질이 난무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보이지 않는 질시로 상처를 입은 이웃이 많다. 흑인과 백인, 내국인과 외국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과 이방인 취급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보금자리를 옮긴 제비꽃은 내가 했던 염려와는 다르게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참으로 기특한 녀석들이다. 자리 탓 한번 안 하고 참고 견뎌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들꽃처럼 다문화 가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바뀌어야 한다. 내 모습과 다르다고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조력으로 끊임없는 응원이 필요하다. 녹색의 몸빛으로 하나가 된 제비꽃처럼 지구촌 사람도 하나라는 생각으로 모두가 다름을 인정하고 보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내 주위에 작은 들꽃을 가꾸는 이웃이 있어 행복하다. 시인 나태주의 시(詩)처럼 이름 모르는 풀꽃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자주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하지 않던가. 척박한 땅에 사랑의 뿌리가 단단히 내릴 수 있도록 우리가 응원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