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의 '결' - 수암골, 골목길 걷다

마을 초입 들마루에 걸터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사위가 깜깜해지고 시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풍경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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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을 돌다 막다른 집에 다다른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끄트머리 집, 허름한 담장의 벽화가 돋보인다. 양 갈래머리 아이가 비탈길을 허정거리며 오르는 중이다. 얼핏 보면 전봇대를 오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아니다. 전봇대와 담장을 한 장의 여백으로 삼아 달동네 풍경을 그린 것 같다.

이 벽화를 그린 작가는 남다른 사람임이 분명하다. 가파른 길을 오르는 아이 모습을 전봇대에, 좁은 골목을 두고 다닥다닥 붙은 집과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남자를 담장에 그린 것이다. 두 개의 대상을 하나로 표현한 것도 남다르지만, 끝없이 나아가는 표현의 발상이 놀랍다. 화가는 이와 비슷한 시절을 보냈거나 마음에 간직한 그리움을 그림으로 대변한 것은 아닐까.

수암골은 청주 우암산 서쪽 자락에 자리 잡은 달동네. 한국 전쟁 때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시간이 흘러 지붕과 바닥을 보수하고 쓰러진 담도 올리고, 자동차로 오를 수 있도록 초입까지 도로포장도 되어 있다. 동네의 역사는 담장에 쓰인 '근면, 자조, 협동'이란 빛바랜 글자가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바로 말해준다.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면 동네 분들이 하나둘씩 골목으로 몰려나와 비질할 것만 같다.

무엇보다 청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동네가 어디 있으랴. 마을 초입 들마루에 걸터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사위가 깜깜해지고 시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풍경으로 바뀐다. 거리의 가로등이 켜지고, 빌딩의 네온사인이 반짝거리고, 집집이 백열등이 하나둘씩 켜지면 어떤 나라 야경이 부럽지 않은 황홀한 세계가 펼쳐지리라.

수암골이 전국에 아니 시민에게 알려지기까지는 오래지 않다. 각종 매체에서 벽화골목으로 소개되고, '카인과 아벨'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지며 찾게 된 것이다. 달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좋은 카페가 몇몇 생겨나 젊은 연인들이 즐겨 찾는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쉽게 오르지만, 도로가 없던 시절에는 연탄과 물동이를 지고 오르기엔 땀깨나 흘렸을 비탈진 동네이다. 향기 좋은 차와 풍광을 즐기는 여유도 좋으리라. 그러나 전쟁 이후 지금껏 선인들이 살아온 생활의 터이고, 옛 문화가 존재하는 삶의 터라 여기고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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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길을 휘돌자 귓전에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유년시절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가기엔 모호한 거리라 걸어 다녔다. 기억에 남는 골목 풍경은 수암골 골목의 풍경과 엇비슷하다. 슬레이트 지붕이나 녹슨 함석지붕, 드물게 기와를 올린 집들. 담장은 이끼 낀 강돌 위에 올린 콘크리트 담이거나 황토로 만든 담, 붉은 벽돌로 쌓은 담이 떠오른다. 골목이 비어있는 날이면, 유난히 정적이 감돌아 두려움이 느껴지기까지 했던 것 같다.

'골목길'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더 있다. 막다른 골목에 붉은 벽돌담 집은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남자 친구가 살았다. 늘 함께 등교하던 친구가 어느 날 미국으로 홀연히 떠나버렸다. 친구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동안 골목이 텅 빈 양 허전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시절 골목에서 일어난 정감을 다 표현할 순 없지만, 잊고 지냈던 과거를 잔잔히 일깨운 수암골이다.

초행자는 골목길을 걷다가 어디가 어딘지 헤맬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걱정할 일은 없다. 어디선가 한길로 만나지니까. 또 나그네는 집집이 대문 앞에 놓인 소소한 작은 화분들을 보고 미소 지으리라. 앉은뱅이 채송화와 풋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 푸릇푸릇한 대파 등 아기자기한 화초를 가꾸는 다정다감한 집주인을 떠올릴 것이다. 한여름, 옥상의 소쿠리에선 겨울 반찬이 될 밀가루를 입혀 찐 풋고추와 무, 청둥호박을 잘게 자른 풋것들이 물기가 마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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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청국장 끓이는 냄새가 풍긴다. 담을 타고 넘어온 정겨운 냄새이다. 갑자기 시장기가 돌며, 그리운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워진다. 예전에는 밥 지을 때면 이웃집에 어떤 반찬을 해먹나 어림짐작할 수 있었고, 울타리나 낮은 담 위로 음식이 오가는 도타운 정이 넘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어디 그런가. 아파트 입구부터 집 앞 현관까지 주민 이외에는 넘보지 못하도록 보완이 철통이다. 그러니 담장 위로 음식을 나누는 일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향수 어린 골목길을 서성인다. 강돌 위에 그려진 자그마한 동물 발자국이 시선을 끈다. 이어 엉성하게 쌓은 벽돌담에 고개를 갸우뚱한 복슬강아지. 금세 집주인을 알아보고 구멍에서 강아지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 집 대문이 열려 있어 안을 엿보니, 놀랍게도 담장에 그린 복슬강아지가 반가운 듯 꼬리질을 한다.

수암골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은 그냥 그려진 것이 아니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1940~)의 말대로 작가의 사명은··주어진 한 사회와 시간 속에서 존재들과 사물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구하는 것··이다. 골목길 벽화에 희미해진 옛 추억과 그리운 형상을, 집집이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인적이 드물었던 수암골에 사람들이 오가고 따스한 정이 흐른다. 허물어진 담장과 바닥에 이끼와 새카만 더께가 앉아 우중충한 골목길이 시민들이 그린 벽화로 환해진 느낌이다. 무엇보다 옛정(情)이 그리운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담아서인지 더욱 훈훈하다. 저기 골목 굽이를 돌아서면, 금방이라도 그리운 얼굴이 나타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