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Barre)를 잡으며
유숙자
신록의 계절 5월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더욱 생기로운 5월, 내 마음에도 작은 불씨 하나 당겨졌다. 마치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놀랍게 아름다운 달 5월에, 모든 꽃봉오리가 피어날 때, 나의 가슴속에도, 사랑이 싹텄어라,’처럼.
오늘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
자카란다가 만발한 꽃 동네를 스쳐 지난다. 한껏 푸르름을 자랑하는 메그놀리아의 윤기있고 두꺼운 잎사귀가 아치를 이루는 숲길을 지나며 계절이 무르익는 5월 속으로 빠져 든다.
친구가 알려준 대로 얼마 더가니 오래된 동네 인듯 나즈막 하고 한가로운 전원 주택 단지가 펼쳐졌다.
우리 가족이 영국을 거쳐 미국까지 오는 동안 서로 소식이 끊겼던 친구. 친구도 결혼한 딸을 따라 이곳으로 온 지 20여년이 되었다 한다. 이 넓은 세상에서 우리의 첫만남은 Colburn School Zipper Hall 에서 였다.
친구의 집은 비교적 넓직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각종 운동기구가 있는 공간이다. 남편이 운동을 좋아하여 Exercise room을 마련했단다. 예전에 발레를 했던 친구는 창가에 바를 장착해 놓았고 한편에 전신이 비춰지는 대형 거울도 있었다. 여기서 이따금 몸을 푼다고.
“우리 한 주에 한 번 정도 만나서 몸 좀 풀자. 운동 중에 체력 소모가 이만한 것도 드물잖아?”
늦었지만 이제라도 운동을 핑게 삼아 옛정을 회복하고 싶은 친구의 자상한 마음이 말 속에 배어 나왔다. 반갑고 고마운 제안이다.
바를 잡는다. 손 안에 착 감기는 촉감. 얼마만에 잡아 보는 바인가? 어린 시절 무용연구소에서 처음 잡아 보았던 바, 시간 너머 세월이 사르르 다가든다.
발레의 체력 소모는 육상 선수와 같다. 1시간 정도 기본동작 연습만 해도 허리 둘레가 줄어든다. 땀을 많이 흘리고 운동량이 엄청나서 굵은 벨트로 허리를 단단히 조여도 시간이 갈수록 헐거워진다.
이제 우리가 이따금 만나 기본 동작을 한다 해도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동작의 한계가 있는 탓이다. 다만 추억 속의 한 때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추억여행을 떠나자는 의미일게다.
발레를 접은 후,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던 타이즈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과거 발레리나의 티는 어디에도 없다. 조금씩 늘기 시작한 체중은 나이들어가며 게으름까지 더하여 자유형이 되었다. 그저 마음만 발레리나일 뿐, 풍만하게 나이든 여인이 있을 뿐이다.
친구는 거울을 가려 놓았다. 그제서야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준비해간 LP 윌리엄 텔 3악장 <정경(Scene)>을 포터블 턴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쉬익 쉬익 툭 툭 LP 고유의 정겨운 잡음과 멜로디가 함께 흐른다. 잉글리쉬 호른과 풀루트가 주고 받으며 알프스의 푸른 목가적 풍경을 펼쳐 주고 있다. <정경>은 발레에 열정을 쏟았던 시절부터 기본 동작과 잘 맞아 아끼던 음반이다. 여러 나라를 거치며 살았어도 소중히 간직해 왔다.
바를 잡고 순서에 따라 몸을 푼다.
엉 두 트르아 카트르 생크 시스 세트 위트, 예전처럼 불어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동작 하나를 여덟박자에 맞추어 연습을 시작 했다.
우선 1번부터 5번까지 발 과 손 동작만 반복했다. 너무 힘들고 숨이 가빠 더이상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데 마음은 에샤페, 아라베스크, 파드브레, 그랑쥬떼, 피루엣, 쉐네 등 어느 동작이고 가능할 것 같다.
기본 동작을 하기에도 무리가 따랐지만, 의욕만큼 버텨준 몸이 고마웠다. 젊은 시절 매일매일이 낯설고, 자신에 대한 예감과 기대로 순간 순간 새롭고 충만했던 기억 속의 나를 불러 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은 숨이 차기도 하지만, 아직도 발레를 향한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리라.
연습을 위한 만남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은 친구도 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나이들어 가며 대화의 빈곤과 아울러 공감대를 유지할 수 있는 상대를 찾기 힘들기에 만남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동작 하나 하나, 발모양과 팔의 움직임에 따라 흐르는 시선을 연결 시키고 느긋한 즐거움 속에 숨을 고르려 할 때 어디선가 생상의 음악 <백조>가 들려 오는 것 같다. 한순간 나는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어디서 들려 오는 음악일까?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푸른 햇살이 조명처럼 쏟아지는 무대, 데뷔 작품 <빈사의 백조> 가 안타깝게 깃을 떨고 있다.
나 아닌 다른 형상이 나를 보고 있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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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가 하나의 시처럼, 글처럼 느껴집니다. 하나 하나의 동작이 음악 마디 마디에 엮어져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 예술품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은 백조의 음악, 그리웠던 친구와 공감대를 형성하며 만나는 것이 멋진 향기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