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반려보다 음악을 더 가까이 두고 살았다.
어려서부터 집안에 음악이 있었고 여중 시절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러 간 곳이 YMCA 화요 클래식 음악 감상이었다. 이날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Op. 61>을 지노 프란체스카티(Zino Francescatti)의 바이올린 연주로 들으며 경의와 감격에 벅차 가슴에 음악이라는 씨앗 한 개 심었다.
오랜 세월 살아오는 동안 음악은 나의 친구이며 정인이 되었다. 사랑이고 기쁨이며
즐거움이고 보람이었다.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관람했고 집에서도 음악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우리 집은 비교적 방문객이 많은 편이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앰프와 음반을 부러워하나 음악에는 관심이 없다. 혹여 차에서 듣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 음반을 빌려 달라는 친구가 있을 때 그들의 청을 선선히 들어주었다. 빌려 간 음반이 절대 돌아오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듣고 있을 테니까.
음악으로 내가 삶에서 맛볼 수 있었던 아름다움이 많았다. 앞으로도 그러할 진 데 누군가와 교류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더 멋지고 보람 있을까? 이따금 씩 드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동호회니, 동우회니 이런 곳을 찾을 생각은 없다. 단만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내 인생이 늦가을로 접어드는 올봄. 어느 모임에서 빈센트 님을 알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분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할 뿐 아니라 전문성을 지닌 음악 애호가라 한다. 내 수필집에는 음악 수필이 여러 편 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한 권을 선물해 드렸다. 몇 달이 지난 후 그분이 우리 부부를 초대해 주었다.
보슬비가 내리다 그쳤다 하여 음악 감상하기에 딱 좋은 5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생전 처음 음악의 이름으로 초대받은 나는 그 댁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떨리고 설렜다. <음악에의 초대>인 탓이다.
아담하게 꾸며진 음악실은 피아노를 비롯하여 오랫동안 간직해 온 매킨토시와 마란츠 진공관 앰프가 나란히 자리했다. 크고 작은 음악 감상 전용 스피커, 영상 시스템 등 많은 음향 기기로 가득했다. LP가 벽면을 채웠고 Blu-ray DVD가 장식장에 가지런했다. 곳곳에 놓인 CD 체스트. 어렵고 낯설어 친숙한 것이라곤 음반밖에 없었다.
첫 연주로 피아니스트인 부인의 <Amazing Grace>가 울려 퍼지며 그 홀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공기까지 사로잡은 듯 충만하게 넘쳐흘렀다. 우리는 모두 기도하는 마음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음악 감상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이 부른 <시편 23편. 나운영 작곡, 윤학원 지휘>로 들었는데 이 곡은 그분이 청년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아끼고 귀하게 간직해온 LP 음반이다.
이어 베토벤의 서곡 중 가장 걸작인 <Leonore No. 3번.>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온 세월 같은 음반들을 간단한 설명과 함께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클래식 음악!’ 하면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날의 분위기에 젖어 물이 흐르듯 음악의 흐름에 나를 맡겼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Notturno 897 <Piano trio in E Flat D. 897 Notturno Op. Posth. 148 >
이 흐른다. 평소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이다. 그날 이 곡을 들으며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감동 내지 영감을 체험했다.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것 같은 일회적 체험, 삶이 그런 것처럼.
이 피아노 트리오는 슈베르트가 31세 생일을 자축하며 ”사람들이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 이라는 자랑스러운 자부심으로 1000번째 작곡한 곡이다.
아름다운 서정성과 센티멘털리즘이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뛰어나 실내악적 장르에서 귀중하게 취급되는 작품이다. 잔물결 같은 피아노 반주 위로 바이올린과 첼로의 음률이 가볍게 떨어져 묻힌다. 여리게 잦아드는 피아노의 연주가 바이올린과 첼로의 강렬함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난다.
가슴 벅찬 순간순간!
스크린 가득 펼쳐진 음악의 향연. 벽 한 면을 차지한 대형 스크린에서 안네 소피 무터가 Beethoven의 <Violin Concerto D major , Op. 61의 2악장>을 연주한다.
무터는, 내가 영국 살 때 데뷔 무대를 보았기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이 가는 뮤지션이다.
그가 이제 중년을 넘기며 더욱 원숙한 솜씨로 베토벤을 연주하고 있다.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무터의 연주. 나를 위해 연주하고 있는 것 같은 감상에 눈물이 나도록 행복했다. “밥은 굶어도 음악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열네 살 때의 나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Dvorak의 심포니 9번<From the New World e minor Op. 95>을 Berlin Philharmoniker, Claudio Abbado의 지휘 영상으로 감상했다.
2악장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요와 흑인 영가의 애절한 보헤미안 향수와 어우러져 듣는 이로 하여금 그리운 고향의 풍경을 생각나게 한다. 잉글리쉬 호른으로 노래하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곡, 여기에 가사를 붙여 합창곡으로 편곡한 것이 ‘꿈속의 고향’(Going hom)이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Beethoven의 <The Ninth Symphony on schiller’s ode to joy>였다.
모리스 베야르트(Maurice Bejart’s)의 베토벤 교향곡 9번의 강렬한 무대. 음악으로 전달되는 형제애의 아이디어가 화제로 남았다. “모든 사람이 형제가 돼라”는 잊을 수 없는 강력한 메시지를 음악과 발레로 250명의 무용수와 뮤지션들이 <표현>이라는 의미로 세상에 전했다.
모리스 베야르트가 안무를 맡고 길 로만(Gil Roman)이 예술 감독을,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리츠유카이 합창단, 베야르트 발레와 도쿄 발레의 무대로 펼쳐졌다.
교향곡과 모던 발레의 조합이었으나 함축과 절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전체적인 흐름에 활력과 기쁨을 주었다. 거대한 화면을 통해 웅장하게 뿜어 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합창, 발레. 눈물과 땀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각고의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했던 <제9 교향곡>은 감동과 감격으로 내게 다가왔다.
빈센트 님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무척 신중한 것 같다. 또한 그에게 따라다니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란 말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닌 듯싶다. 레코드로 음악을 들을 때에도 연주 홀에서 실제로 연주하는 무대를 보는 듯한 예의와 존경으로, 음악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감상을 담아 객석에 앉아 있는 느낌으로 감상한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분은 삶이 예배이고 기도이며 신앙이듯이, 음악도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임이 각인되어 있었다.
신중한 선곡과 음악에 대한 엄숙한 예의, 시종 여유 있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음악 감상, 정성을 다하여 음악의 향연을 베풀어 주신 빈센트 님 내외분께 마음으로 감사드린다.
음악의 이름으로 초대되어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연주곡을 들으며 음악의 부름에 완전히 호응했던 시간. 가슴이 꽉 막히게 아름다운 순간, 감동, 희열로 숨죽인 체 꼼짝할 수 없었다.
오늘의 이 시간이 주어 짐은 긴 세월 동안 참아낸 음악에의 그리움이어서 감정의 수위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음악을 듣고 있었지만, 감상했다기보다 꿈을 꾸고 있었고 그 꿈이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날 밤 음악은, 내 영혼을 존재케 하는 의미 이상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2019)
2020년 2월 23일을 끝으로
음악에의 초대를 받지 못했다.
Covid 19 탓이다.
올 여름 쯤이면 다시 연주회와 음악 감상을 할 수 있을까?
두 번째 Vaccine 을 맞고 두 주가 되는 날이다.
서광이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