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지도외(置之度外)한 인생
유숙자
경진 庚辰생 용띠인 나는 백룡의 해에 태어났다.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은 인간을 뜻한다고 한다. 용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신의 선물인 여의주를 입에 물어야 한다는 전설 속 동물이다. 용띠의 상징은 인간에게 이상과 꿈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라는 암시적 의미가 아닐까 하는 나름의 생각을 해본다.
누가 내 띠를 물으면 용띠입니다. 한다. 높은 띠이군요. 상대방의 말이다. 글쎄요. 높은 띠인지는 모르겠으나 출생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띠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는지 모르겠으나 건강하게 태어나기는 했는데도 하마터면 베넷 젖 한 모금 빨아보지 못하고 스러질 뻔했다.
해방 전, 그때는 산파가 아기를 받던 시절었는데 아기가 태어나고 산파의 처치 미숙으로 어머니는 급히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셨다.
병원에서 의사의 촉진을 받으며 위급상황에서 벗어난 어머니가 ‘아기는?’하고 외치셨단다. 그때까지 아버지, 이모, 주변 사람이 산모에게 만 신경을 썼지, 빈집에 방치된 아기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산모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뿐 핏덩이 같은 아기에게 관심 가질 경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모가 황급히 집으로 향하며 거의 두 시간여 방치한 아기가 살아 있을까 죽었을까 걱정과 죄책감 속에 집안으로 들어서니 안방에 아기가 없더란다. 이모는 혼비백산하여 갓난아기란 것도 잊고 방마다 찾아보았는데도 아기가 없자 기진하여 방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데 어디선가 쌔근쌔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더란다. 사방을 둘러보니 책상 밑으로 깊숙이 밀쳐진 아기가 포대기에 싸인 채 잠들어 있더란다. 누군가 산모를 움직이느라 걸리적거리니 밀어 놓았던 것 같다. 신비스럽기까지 하다는 용띠 나는, 명이 길어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것 같다.
1950년 6월 초, 개성 친가에서 작은아버지가 서울에 오셨다. 맏아들인 아버지께서는 공부에 뜻이 있어 일찍이 부모님 곁을 떠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대소사를 의논할 일이 있을 때마다 서울 구경을 겸하여 몸소 상경하시기도 했지만, 큰아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작은아버지를 상경시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번에 둘째 손녀인 나를 보고 싶다 하셔서 방학 전이지만 잠시 개성을 다녀와야 했다. 환갑을 넘기기가 힘들었던 그 당시에 육십 중반의 할아버지 말씀은 곧 법이었다.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언니와 함께 할아버지 댁에 가서 한 달가량 머물며 사촌들과 미꾸라지도 잡고 산딸기도 따 먹으며 즐겁게 지내다 왔는데 이번에는 방학도 되기 전에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았으니, 상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왕세손이 된 기분이었다.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 댁 삼포 밭과 제반 일들을 의논하고 서울 구경을 하신 다음 떠나게 되었다. 나는 언니가 싸주는 가방에 몇 권의 책을 넣고 학예회 때 입었던 무용복도 슬쩍 넣었다. 할아버지 앞에서 춤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였다.
6월 중순, 작은아버지와 함께 전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표를 사고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려야 개성행 기차를 타게 되어 역사 안 의자에 앉았다가 시계탑 근처를 서성이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을 때 저만치서 헐레벌떡 숨이 곧 멎을 것 같은 모습으로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작은아버지와 내 앞에서 숨을 채 고르지도 못한 체 ‘아주버님, 안 되겠어요. 얘는 무서움을 잘 타서 밤에 꼼짝 못 해요. 큰애가 방학하면 그때 같이 보낼게요. 아버님께 잘 여쭈어 주세요’. 작은아버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어머니는 내 손을 낚아채듯이 움켜쥐고 냅다 큰길로 달리셨다. 시골집 문밖의 화장실을 핑계 대었으나 어머니는 어떤 예감이 있으셨던 것 같다. 열흘 후 6.25 전쟁이 일어났다.
용띠는 가상의 존재이기에 살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는 별로 없었다. 일상 이야기 속에서조차 놀림이나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았다. 다만 용띠인 내가 태어나자마자 치지도외한 인생이었던 점, 하마터면 이북 에미나이가 되어 부모 형제를 그리며 송악산 봉우리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며 평생 눈물짓다 망모석 望母石이 되지 않았을까. 절체절명의 순간에 선견지명이 있었던 어머니 덕분에 생이별을 모면한 감사는 다시 태어난 감격과 맞먹는다.
여의주를 입에 물지 못해 하늘로 승천하지는 못했지만, 가난한 마음과 풍성한 꿈과 높은 것을 지향하는 정신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