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된 명성

                                                                                                        유숙자

 

플라시도 도밍고가 무대에 선지 60년이 되었다.

1980년부터 나는 플라시도 도밍고의 공연을 자주 보았고 미국에 이주해서  40주년 잔치, 50주년을 보면서 인생을 음악에 송두리째 바친 도밍고의 음악 예술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오페라를 처음 관람한 곳은 런던이다. <라 트라비아타>였는데  로열오페라 하우스에서 단일종목으로  329회째 공연이었다.  40대 초반인 도밍고는 오페라 가수로서 외적 조건인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가 무대를 꽉 차게 만들었다. 부드러우면서 박력 있는 가창력은 청중을 극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어 오페라의 적역이었다. 오페라는 타고난 목소리와 연기도 중요하나 그 못지않게 배역에 맞는 외모와 일치할 때 얻어지는 효과가 큰 것 같다.

 

이 가을, 예쁜 단풍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낙엽 같은 기사가 신문을 오르내렸다. 이 기사는 조락의 가을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몇 번의 불미스러운 사건은 소문에 꼬리를 물었다.  공연 취소의 소식이 잇달아 전해지더니 도밍고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다시는 서지 않을 것을 합의했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그가 처음 올랐던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한  평생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건만,  맥베스 공연을 앞두고 오페라 무대를 떠날 수 밖에 없음이 도밍고에게 크나 큰 가슴저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도밍고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관람한 것도 라 트라비아타였다. 당시 아들이 관람을 제의해 왔을 때, 처음에는 거절했다. 티켓 가격이 엄청났다. 라트라비아타는 내가 좋아하는 오페라여서 도밍고를 비롯하여 다른 테너들의 공연도 여러번 감상했다. LP, CD, DVD,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소장하고 있기에 고가를 지불하고 관람하기는 부담스러웠다. 

아들은 ‘나이들어가는 도밍고의 오페라를 엄마가 앞으로 얼마나 더 볼 수 있겠느냐’ 며 임의로 티켓을 구매하여 보내주었다.  

그때 도밍고는 알프레도 제르몽의 아버지인 바리톤 조르쥬 제르몽 역을 맡았고 그것이 내가 미국 무대에서 본 도밍고의 마지막 무대였다.

 

1985년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해 LA 북쪽 발렌시아에 둥지를 틀었다. 한국 사람도 한국 마켓도  없어 외로움에 시달리며 유럽에서 즐겨 감상했던 오페라와 발레의 향수에 젖어 있을 무렵 도밍고의 이름이 신문을 장식했다. 그때의 감정은 그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연을 감상한 이상이었다. DVD로 CD로 오페라와 아리아를 들으며 그가 LA 무대에서 공연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해 도밍고가  LA 오페라 뮤직 디렉터로 부임해 왔다. 세계적 테너로 지휘자로 자주 대할 수 있게 된 것이 나를 포함하여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그의 팬들에게 대단한 기쁨이었다.

 

그가 30여년 동안 정든 집처럼 드나들었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 LA 오페라에 쏟은 열정은 우리들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본 오페라와 연주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도밍고의 공연 일정만 보아도 가슴 설레며 기다리던 기쁨. 그가 공연하는 오페라를 보고 있으면 그가 출연함으로써 작곡자가 의지하고자 했던 기대 이상의 효과로 연기하는 것 같았던 감동.

 

파바로티가 타계한 이후여서 이 시대 최고의 테너가 나이 들어감을 팬으로서 안타까워 했는데 머지 않아 은퇴를 앞둔 지금 세계 정상의 성악가에게 다가온 불명예 소식은 그를 아끼는 많은 오페라 팬들에게 충격을 넘어 안타까움을 안겨 주었다.

명성과 지위와 부, 모두를 가진 그의 마음 속에도 공허가 자리하고 있었단 말인가? 정말 모르기 만한 일이다. 

 

처음으로 바리톤 조르쥬 제르몽의 역을 맡았을 때 그의 부인이 개막전 오페라 해설을 맡아  나의 부러움을 샀다. 세련되고 멋진 부인이 우아한 태도로 보여준 해설, 클래식 마니아인 내가 꿈꾸던 모습을 순간이나마 상상해 보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클래식에 빠져 살던 나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배우자를 만나 음악을 공유하든지, 음악가의 부인이 되어 예술가의 동반자로서 스케줄과 음악 영역을 담당하고 세계를 두루 누비며 공연을 도울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꿈이 꿈으로 머물렀으니 도밍고 부부를 보며 부러워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영국에서 도밍고를 처음 만났을 때 황홀했던 순간. 남편의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먼 런던까지 가서 공연을 관람하고 차디찬 2월의 새벽, 텅 빈 거리를 택시를 타고 무서운 줄도 모르고 집으로 향하던 그때의 감격이 새삼스럽다.

발트 뷔네를 비롯한 야외 음악당에서도,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며 지휘하며 늘 우리들 가까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 언제까지 있을 줄 알았다.    

2001년 7월 발트뷔네 콘서트 ‘스페인의 밤’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무대에 데뷔했고 이때 사라 장이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타이스의 명상곡을 연주하여 호흡의 일치를 이루어 찬사를 받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06년 ‘월드컵 기념 베를린 콘서트’에서 플라시도 도밍고, 안나 네트렙코, 롤란드 빌라죤과 함께 출연하여 젊은이들과 겨루어도 뛰어난 가창력으로 그의 존재를 빛냈고 온몸으로 갈채를 받았던 오페라의 영웅. 비록 머리에 서리가 내렸어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젊은이 못지 않았는데-.  그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다음 공연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에게 박수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많은 팬들의 마음도 착잡해지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힘들게 쌓아 올린 명성에 더 이상 험이 가지 않게 이 일을 반면 교사로 삼아 머지 않아 우리가 즐겨 관람하던 오페라 무대로 다시 돌아와 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의 인간적 실수가 예술의 명성에 더 이상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