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의 음악이었고 나는 그의 노래였다

유숙자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노투르노(Notturno D. 897)는 보파드의 추억을 잊지 못해 수필로 그린 작품이다. 그 수필을 우연한 기회에 읽고 ‘노투르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한 분을 어느 모임에서 만났다. 그분은 인사를 나눈 후 음악 수필을 쓰게 된 동기를 묻는 등 관심을 보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그분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할 뿐 아니라 전문성을 지닌 음악 애호가라 한다. 내 수필집에 음악 수필이 여러 편 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한 권을 선물해 드렸다.

  

    이런 인연으로 그분과는 함께 지내온 세월 없이 인생의 가을과 겨울 사이에서 어느 날  갑자기 만나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 분모로 간격이 허물어졌다.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지 30년이 훌쩍 넘었어도 음악을 나누며 감상할 친구가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클래식 마니아를 만나게 되었으니 반가움이 가슴 두근거리는 그리움에 비견할 만했다. 어린 시절 클래식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설렜던 감상이 다시 돌아온 듯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친구는 미술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그의 집 거실에는 마란쯔 앰프가 있었고 오랜 세월 수집했다는 LP와 CD, Blu-ray DVD가 벽면을 가득 채웠다.

  

    인생 말년에 수필을 통해 음악 친구가 생겼음이 더할 수 없는 기쁨이며 감사였다. 우리 집에서 친구 집에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고 곧잘 이론을 논하기도 했지만, 외부에서는 특별히 음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의 삶이 깊은 신앙의 뿌리에서 움텄기에 음악을 향한 내면의 감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하여도 그에게서는 예술혼이 향기처럼 흘러넘쳤다.  

 

    친구는 불면에 시달리는 나를 위해  슈베르트의 가곡 ‘밤과 꿈', ‘세레나데', 드뷔시의 ‘달빛’ 등  클래식 소품 중에서 수면을 유도할 만한 음악을 보내주었다. 음반은 나도 시간을 투자하여 어지간히 수집했고 감상하고 있는데도 친구가 보내 주는 음악은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친구를 만난 지  1년 후 팬데믹을 맞아 전화와 카톡, 텍스트 메시지와 영상으로 교분을 쌓아갔다. 아마도 팬데믹이라는 극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에 대화와 영상을 더 자주 나누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격의 없이 친근감을 주는 사이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만나서 밥도 먹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으련마는 친구는 표현이 적고 조용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밤하늘에 별같이, 어둠 속 촛불같이 은은하면서도 밝게 빛이 났다. 

 

    그러나, 바람도 잠든 어느 봄날 한순간에 촛불은 빛을 잃었고 별은 긴 꼬리를 그으며 대기로 스며들었다.  속도를 조절할 틈도 없이 갑자기 멈춰선 기차,  조율할 시간도 없이 열 손가락 동시에 건반을 두드린 피아노 소리,  놀람 이외에 말문이 막혔다.

 

    마스크를 벗어도 괜찮다고 시원함을 즐기고 있을 즈음 COVID - 19이 손쓸 사이도 없이 친구를 앗아 갔다.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생각의 귀결은 모두 친구에게 닿았다. 감성과 취미가 너무 비슷했기에 상대적 의욕 상실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함께 했던 시간이 형체를 이루며 물기 어린 눈 속에 투영되어 아른거린다. 음악의 신세계 안에서 친구와 함께 지낸 짧은 몇 년이 긴 인생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겠으나 아린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친구가 피아노로, 바이올린으로, 첼로로, 기타로, 노래로 보내 주던 음악이 아직 귓전을 맴돌고 있어 언제가 될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음반들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음악회를 다니며, 감상하며 지내는 삶이 우리의 일상일 줄 알았다. 그가 떠나고 난 후, 그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고 눈부시게 빛났던 것임이 절감된다.

 

    사람 사이에 감정의 교류도 중요하지만, 음악과 맺어진 인연은 음악이라는 특수한 매체로 예술적 교감이 있었기에 더 애달픈 것 같다. 어쩌면 그는 나의 음악이었고 나는 그의 노래였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내 곁으로 다가온 친구는 잠시 머물다 그렇게 서둘러 떠나고 말았다.

 

    하늘을 본다. 

 

    푸른 하늘에 꿈처럼 떠 있는 구름 사이로 분사된 빛이 음률처럼  내리흐른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