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나의 연인
유숙자
나의 아침 일과는 음악과 함께 시작한다. 선호하는 음악의 2악장을 들으면서 식사를 준비한다.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하루 일과가 일목요연하게 펼쳐 진다. 거실 한편에 좌정해 있는 Mclntosh Amplifier는 우리 가족이 영국 살 때, 내가 받은 마흔두 번째 생일 선물이다. 그날 남편은 Mclntosh Amplifier, JBL Speaker, Thorens Turntable등을 예쁜 컨테이너에 담아 주었다. 미국에서 주문한 지 3주 만에 도착한 깜짝 선물이었다.
음악이 마음을 따랐는지 마음이 음악을 따랐는지 삶이 음악이었던 젊은 시절, Mclntosh Amplifier 갖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음악에 관심이 없는 남편이 귀담아 들었을리 없고 나도 희망 사항이었을 뿐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매킨토시 앰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음악의 벗’이라는 일본 월간지에 ‘앰프의 제왕 매킨토시’ 라는 기사를 보고 나서였다. 선친께서 음악을 좋아하셔서 음악 들을 기회가 많았으니 자연스럽게 음향기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한 번만이라도 매킨토시 앰프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했지만, 음향기기 이름조차 생소한 때였다. 70년대 중반 당시에는 수입 규제가 엄격하여 물품도 귀할뿐더러 고가품이어서 꿈에서나 그려 볼 일이었다.
큰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그해 겨울 아들 친구 집인 이웃에서 나를 초대했다. 그 댁에 들어서니 벽 한 면이 병풍으로 가려져 있었다. 차를 마시며 담소 도중 부인이 병풍을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그때 엄청나게 큰 스피커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히 놓여 있는 앰프. ‘McIntosh’ Preamplifier 와 Power Amplifier의 푸른 활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부인이 이따금 우리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음악 소리가 들리기에 음악을 좋아하는 이웃이 있고나 싶어 나를 만나고 싶었단다. 숨이 멎는 것 같은 전율이 일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 앰프는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그날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들었다. 단 1악장 만이라도 매킨토시의 음향으로 심포니를 듣고 싶었으나 첫 방문이어서 주인이 선택한 음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음률이 옥구슬처럼 구르며 흐른다. 섬세할 때는 말갛게 보이는 실핏줄처럼 투명하고 가냘팠다. 찰라 적으로 지나간 것 같은 몇 분. 나는 음악을 감상했다기보다 음악 속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다만 내 귀가 음악으로 정화되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
여러 해가 지난 후, 남편이 런던 지사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다. 그때 제일 먼저 머리를 스친 것이 LP 음반을 원 없이 구할 수 있겠구나! 였다. 우선 앰프는 없어도 음반부터 준비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지휘자의 연주곡이나 연주자의 음반을 장르별로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움에 이어 맞을 보람을 나는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 아뽈리 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 중 한 연을 좋아하는 나에게 꿈꾸며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음악이 흐르면 흥얼거리기는 해도 음악에 관심이 없고 듣지 않아도 전혀 불편함이 없이 살아온 남편이었다. 아내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매킨토시 앰프 갖는 것이 꿈이라 했던 말을 기억했다가 생일에 선물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것이 표현의 전부였다. 어찌 고마운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고맙고 고마울 뿐.
진공관이라 소리가 깊고 은은하여 트랜지스터와는 사뭇 소리의 폭과 무게가 달랐다. 더 좋은 앰프가 있다고 하고 더 저렴하면서도 음질이 뛰어난 앰프도 있다지만, 나는 첫눈에 반한 첫사랑같이 매킨토시 앰프 이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느 계절에 들어도 좋은 메사이어와 천지 창조는 거실이 울릴 만큼 볼륨을 높여 놓아야 감동이 배가한다. 매일 들어야 하루가 시작 되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897 Notturno, 쇼스타코비치의 로망스, 드뷔시의 달빛은 언제나 나의 음악실에 흥건히 고여 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후랑코 코넬리, 플라시도 도밍고의 오페라. ‘미샤 엘만의 신기에 가까운 바이올린 연주가 가슴을 에고, ‘클라라 하스킬’의 열정적인 피아노 연주가 물결처럼 출렁인다. ‘파블로 카잘스’의 첼로 음률이 공기까지 사로잡고. 이들이 있어 내 삶이 여유로웠고 풍성했다. 근래에는 데뷔 무대부터 보았던 안네 소피 무터의 바이올린 연주를 많이 집어든다.
매킨토시 앰프가 내 품에 안긴 지 37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LP 와 CD를 연주하고 함께 즐기며 세월을 나눴다. 이제는 소리도 전 같지 않고 스피커에서도 잡음이 들리고 턴테이블도 자동으로 되지 않지만 지금도 나는 그들 앞에 서면 가슴이 설레고 물보라가 안개처럼 인다.
내게 찾아와 꿈을 꾸게 하였고 보람과 기쁨을 주어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준 ‘매킨토시 앰프’는 나의 영원한 사랑이며 연인이며 또 다른 나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