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담는 사람들

                                                                                                                   유숙자

    아들 내외에게 등 떠밀려 떠났던 크루즈 여행은 예상보다 좋았다.

    신혼여행을 크루즈로 시작한 큰아들네는 해마다 봄, 가을 한차례 씩 바다로 간다. 휴식을  위해서는 크루즈만한 것이 없다며.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권했지만, 여행은 서너 가정이 함께 가야 재미있는데 주변에는 크루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남편과 둘이서 떠나려니 단둘이 있기는 집이나 배 안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아 선뜻 내키지 않았다.

    남편은 말수가 적. 말을 건네도 단답형이어서 말이 끊긴다. 공통분모를 찾지 못해서일까? 웬만한 일은 암묵의 이해로 성립된다. 이곳 사람들은 식사 시간이 즐거운 대화 시간이건만 우리는 너무 점잖아 조용히 식사만 한다. 이런 일이 어제오늘이 아니고 50년 결혼 생활에 거의 변화가 없다.

 

    결혼하고 2년쯤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오셔서 '너희는 연애 결혼한 사이이고 젊은 부부인데 어쩌면 서로 소 닭 보듯 하니?' 하셨다. 서로 너무 무심하기에 하신 말씀이다. 이미 그때부터 소 닭 보듯 한 사이, 나이 들어가며 말수가 줄면 줄었지 늘었을 리 만무다. 그러니 단둘이 가는 크루즈가 선뜻 당길 리 없잖은가. 아들의 정성이 고마워 못 이기는 척 마음 정하고 나니 그제야 막연한 호기심이 다. 그래, 떠나자. 떠난다는 것, 일상의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설레지 않는가.

 

    여름을 삼킨 바다에 가을이 고즈넉이 내려앉았다. 바다도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는 듯 짙고 푸르다. 세상 섭리에 순종하려는 경건함이 배어 있는 듯싶다. 떠나 오기 전 막연했던 것과 달리 바다는 보는 것만으로도 생동감이 느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과 파도와 물새들로 겁다.

    배를 타기 전과 후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나를 위해 시간을 쓰는데 바다 여행이 제격인 것 같다는 예찬론까지 든다. 웃음이 날 지경이다. 사람의 마음이 어찌 이리도 간사할까. 이 때는 오히려 말 없는 남편이 고맙기까지 하다.

 

    일상 필요한 것들이 골고루 갖추어 , 넓어서 좋았다. 짐을 풀고 할 일이 없으니 느긋하고 안정감 있다.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였었나? 이번 기회에 푹 쉬고 싶었다.

    밤이 새로운 항구로 실어다 주어 낯선 아침을 맞게 된다. 발코니에 차를 마시고 음료를 즐긴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마음으로 감상한다.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현실감 없는 무지개가 신비의 극치를 이룬다. 가장 무심한 상태에서 침묵을 연주하는 바다. 그 침묵이 어찌 그리 깊은지 시간의 흐름이 켜켜이 쌓여 완성된 사색의 같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고요로움이 시의 행간처럼 놓이는 휴식. 서둘러 가던 길을 멈추고 피곤함에 지친 한때를 쉬며 즐기는 나를 만난다.

 

    지는 것을 보려 발코니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장 고운 색채만을 응집하여 꽃 피우는 놀. 하루의 인생을 끝내고 찬란한 빛과 색깔로 하늘에 물감을 뿌리며 스러져 가는 석양. 이를 비극이라 부를 수 없고, 허무라고, 슬픔이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취할 뿐, 경탄할 뿐.

    내 삶도 저 같을지니. 하루의 저녁처럼 겨울로 접어든 지금, 지난날의 푸르렀던 여름과 곱게 물들었던 가을을 회상한다. 젊음을 사르며 황홀이 꽃피우던 인생의 정점에서 내려선 내가 마주 보며 서 있다. 지울 수도 다시 그릴 수도 없는 한 폭의 그림, -. 그저 바라볼 뿐이다.   

 

   크루즈의 백미인 만찬. 우리 테이블의 손님은 40대 젊은 남미계 부부, 70대 중반의 백인 부부다. 그들은 예의 바르고 조용한 분이었고 인사에서부터 품위를 엿볼 수 있었다. 젊은 부부는 음악도여서 먼 도시까지 연주회를 찾아다니는 클래식 마니아이고 70대 부부는 현역에 있는 사업가로 부인 젊은 시절 발레리나였고 한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짜 맞추어 놓은 것 같이 우리 테이블의 여섯 사람은 취미와 취향이 같아 대화가 무무진하게 이어졌다. 저녁 식사 후 각자 예정해 놓은 프로그램이 있는데 훌쩍 2시간을 넘기 일쑤다.

 

    크루즈는 바다 여행뿐 아니라 바다를 담기 위해 그 길 위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 있다. 대양을 품에 안고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낯선 이들과 이야기를 엮어갈 때 또 다른 여행이 시작 된다. 변해가는 자연, 가을 정취, 이런 추억으로 다음 여행에 대한 설렘을 품게 한다. 일상 속에서 일상을 초월하는 힘, 삶의 눈을 밖이 아닌 안으로 돌리는 일에서 의미와 기쁨을 찾아 서로 다른 것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만든다.

     마지막 밤, 우리 테이블 팀은 각종 모임에서 자리를 함께했기에 십년지기가 된 듯 아쉬워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사진 찍고 정보도 교환했다. 우리는 내년 가을 두 주간의 스페인 여행을 꿈꾸는데 이의가 없었다. 그 계획을 위해 백인 부부의 라호야 댁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크루즈에 동행할 사람이 없어 쓸쓸할 것 같았던 나는 바다에서 친구를 만나 시간을 쪼개어 가며 삶을 즐겼다. 여행은 나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를 갖게 했고 내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 가장 무심한 상태에서 바라본 하늘과 바다와 파도의 속삭임이 활력을 안겨 주었다. 아름다운 것은 살아 있는 것. 단 하루만으로 생애 전부가 될 수 있도록 기뻐하며 감사하며 공복처럼 신선함을 유지하고 싶다.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초록색 여운을 즐긴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