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다 / 제은숙

 

 

쓰는 이를 모른다. 아무도 오지 않는 첫 새벽이나 늦은 저녁 산길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남겨진 빗자루를 발견하기 전까지 그곳이 쓸려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정갈했던 길을 무심하게 밟았던 나날과 그의 존재를 깨닫게 된 순간은 전혀 다른 걸음이 되었다. 솔가리와 낙엽은 길섶에 두툼하게 쌓였고 삭정이나 부러진 가지는 비탈 멀리 던져졌다. 어느 까마득한 골짜기에 잠들어 있을 굵은 나무 둥치도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길이 아니었다. 이 무수한 날들을 쓰는 이는 누구였을까.

그를 상상해 보았다. 낙엽이 쉴새 없이 떨어지는 늦가을부터 연일 쓸었을 테니 산불 관리인임에 틀림없다. 적적하던 차에 시간을 때울 겸 시작했을 것이다. 겨울 부업인지도 모른다. 산을 오를 때 빨간 모자를 쓰고 인사를 건네는 남자가 있었는데 만나면 물어보리라. 그가 아니라면 누군가 몰래 선행을 베풀었는지도 모른다. 자주 비질이 되었으니 인근 주민으로 짐작되고 외진 시간에 혼자 오르기가 꺼려지지 않는다면 남자로 여겨지며 새벽이나 저녁 시간을 낼 수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노인일 가능성이 크다. 생각을 끼워 맞추는 동안 딱따구리만이 인적 드문 계절을 딱딱 쪼아 댔다.

쓰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시로 솔가리가 떨어졌을 테고 새벽 공기는 차가우며 오르막에서는 숨이 찼겠다. 더구나 등산로 초입에는 무덤이 즐비하여 을씨년스럽기까지 했으리라. 어떤 구역은 묘비 가장자리를 지나가야 하는데 쓰는 사람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번성한 가문의 높은 봉분 옆이나 비석 없는 낮은 흙무덤 근처도 한결같이 쓸고 갔다. 잠시 머무는 방문객들과 오래전부터 누운 옛사람들이 그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다.

산길을 쓴 까닭이 궁금했다. 굴러떨어졌거나 처박힌 것들에 눈길이 머문다. 버려졌거나 버린 흔적들. 혹은 잊지 못한 이름과 무너져 내린 한때. 가슴 빼곡히 들어찬 번민을 떨쳐내려던 고행이었을 수 있다. 허공을 울리는 대빗자루 소리가 그를 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귀를 씻기고 머리를 식히는 산의 울림을 그는 들었는지도 모른다. 잊으라 잊으라 잊으라, 한다.

펜으로 쓰는 길을 떠올렸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지우고 싶은 흔적, 끝끝내 마무리짓지 못한 시간을 쓸고 싶은 사람들의 길이다. 혼자 쓸어야 하므로 외로울 각오와 끝까지 벗어나지 않겠다는 결의가 필요하다. 가파른 길이 나타나면 계단을 놓아야 하고 뒤따르는 사람들을 인도할 이정표도 세워야 한다. 앞을 쓸면서 수시로 등 뒤를 살펴야 하며 잘못 쓸었다면 되돌아갈 용기도 지녀야 한다.

우연히 들어선 길이었다. 처음 그 길은 뒤엉킨 생각들과 감정의 찌꺼기로 어지러웠다. 산책 나온 듯 구경만 하느라 방향을 잃을 뻔했고 쓰는 법을 몰라 시작점부터 허둥댔다. 앞서간 이들이 쓴 길은 더없이 환해 보였고 함께 발을 뗀 이웃들의 솜씨도 나무랄 데 없었다. 내가 쓴 첫 구간은 그래서 여전히 너저분한 채로 남았다. 누가 찾아올 리 없는 시절이 지나고 길을 내려다보았을 때 새로 쓸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쓰는 사람의 운명이라도 타고난 듯 소맷자락을 걷어붙였다.

길을 덮은 낙엽부터 들여다보았다. 자주 쓸어야 하는 상념들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화를 냈거나 되레 상처받은 일, 싱거운 수다를 떠는 오후와 아이들을 키우며 울고 웃는 일상이 수두룩하게 깔렸다. 쓸다 보니 대수롭지 않은 일도 있고 잠시 멈추어 서게 하는 뭉치도 널렸다. 잔바람에도 분분히 날리니 쓸고 거두어서 가장자리에 모아 둔다. 사소한 가랑잎이라도 떨어지지 않으면 내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삭정이가 떨어질 줄 몰랐다. 안간힘을 쓰며 붙어있느라 기력이 다한 가지는 시커멓게 변한 채 추락했다. 비틀리고 퉁퉁 부은 흔적이 마디마다 역력했다. 얼마 동안 울었던 걸까. 돌아보면 세월만 허비했던 일에 오래 매달렸다. 영혼을 찌르고 할퀴던 잔상들을 주워 올라오지 못할 벼랑에 던진다. 어지럽게 들끓던 가슴이 가라앉는다. 쓰는 일은 마음 더 깊은 곳에 삭정이를 묻어야 하는 수련의 연속이었다. 멍든 가지가 뭉그러지고 삭아서 어린 풀뿌리에 가 닿기를 바라본다.

껍질뿐인 나무가 길 한가운데로 쓰러졌던 날, 어찌할 바를 몰라 멈추었다. 허물어진 나무의 몸통은 더이상 서 있기 힘들다고 말하는 듯했다. 손으로 툭 건드리면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뿌리째 뽑히던 시간, 삶을 송두리째 흔들던 날들이었다. 그대로 둔다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처지였다. 집어 올리기 벅찬 고사목을 비탈길 아래로 굴렸다. 긴 시간 숲을 울리며 멀어졌다. 선 채로 지독하게 앓았을 지난날이 곯은 가죽을 벗고 새 생명을 위해 제 살점을 풀어놓겠지. 과거의 허물도 괜찮다고,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고 쓰는 동안 길이 일러 주었다.

때로는 설산에 파묻은 사연을 끄집어낸다. 녹지도 썩지도 못할 독기 서린 시간이 펼쳐진다. 멈춰버린 순간. 가시 돋친 파국의 언어를 도려내려 애쓴다. 칼끝도 들어가지 않는다. 아직은 더 동토 속에서 견뎌야 할 감각들. 흐물흐물 녹아내릴 날을 기다리며 지금은 쓸 수 없는 삶의 파편들을 다시 설산에 내맡긴다. 머리를 쓸고 눈동자를 쓸고 가슴을 쓸다 보면 발아래가 가지런해질 것이므로.

바람이 몹시 불었던 날부터 산길이 어수선하다. 길 쓰는 이는 어디로 갔는지 흩어진 솔잎과 삭정이가 한동안 그대로였다. 쓸어놓은 낙엽 더미는 푹신하게 부풀어 봄꽃을 피우는데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쥐었을 빗자루도 보이지 않는다. 길의 경계가 흐릿해지던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길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빗자루를 찾게 되면 쓸어보리라. 쓰는 사람이 되어 쓸어서 길을 여는 사람이 되어보리라. 겨우내 발 앞을 쓸어준 이가 가르쳐 주었다. 산을 쓰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은 다르지 않다고. 나는 여전히 제대로 쓰는 법을 모른 채 산길을 쓴 이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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