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왔다/ 한복용
편두통을 달고 살던 둘째언니가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의 뇌 시술을 받았다. 퇴원하고도 한동안 힘든 일을 삼가야 해서 주로 집안에서 생활했다. 외출을 안 하니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왔고 친척들도 자주 문병을 왔다. 활기찼던 언니 일상은 고요 속 말줄임표로 이어졌다. 대답대신 빙긋 웃는 날이 잦았고 그조차 점점 귀찮아했다. 입맛을 잃었으며 대화 중 가끔씩 뒤돌아 눈물을 닦았다. 결혼해서 지금껏 몇 사람 치 일을 해냈던 사람이다. 어느 날 갑자기 환자가 되어 하루 종일 텔레비전 화면을 보거나 장시간 스마트폰이나 들여다보려니 답답할 만도 할 터이다. 우울감도 쌓였을 테다.
함박눈 내리고 며칠 후, 이웃동네 친구가 코다리를 만들어보라고 명태를 열 마리나 가져왔다. 아주 바짝 말리기보다는 반 건조 시키는 것이 기술이라며 이게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너스레를 떨고 갔다. 언니는 친구가 놀린다는 걸 알면서도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모처럼 음식을 만들고 싶은 의욕이 생기면서 의외로 맛이 좋다는 말에는 용기마저 발동했다.
강원도 여행할 때 덕장에 말린 걸 본 기억이 났다. 허영만 작가의 ‘백반기행’에서 유심히 봤던 조리법도 기억 저편에서 살아났다. 시늉이라도 내보고 싶었다. 아가미에 노끈을 끼우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그것도 일이라고, 두 눈 딱 감고 하니 명태 열 마리쯤 일도 아니었다.
이 집을 지으면서 형부는 현관 쪽 지붕 밑에 철봉을 설치했다. 언니는 작업을 마친 명태를 철봉에 척척 내다걸었다. 가끔 쏟아지는 비도 어쩌다 내리는 눈도 피할 수 있었다. 마당에서 사료를 먹고 가는 들고양이도 그곳까진 넘보지 못했다. 밤낮으로 걷었다 널었다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대로 걸어두면 꼬들꼬들하게 반쯤 말라 코다리 본연의 폼을 낼 것 같았다.
서른 넘어 결혼한 언니는 한 살 터울로 남매를 두었다. 첫째인 딸은 삼십이 훨씬 넘은 미혼으로 언니 집과 연결해 따로 집 한채 지어주었다. 장가간 아들한테서 여섯 살 손자와 세 살 손녀를 얻어 맞벌이하는 아이들 돕겠다고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에 손주들을 맡아준다. 아들부부는 그 시간에 자기들 일을 보거나 친구들을 만나기도 한다. 엄마 옆집에 사는 누나가 아이들을 함께 돌봐주니 그들로선 좋은 일이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놀아주고 창의적인 놀이를 찾아 땀이 나도록 뛰어주니 그 집에 가면 웃음소리만 퍼진다.
명태가 겨울 찬바람에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그날도 언니네 손주들이 다니러 왔다. 애들 고모는 여느 때처럼 거실에 6인용 텐트를 치고 아이들과 가상 바비큐를 하고 있었다. 너른 통유리 너머로 바깥 풍경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그야말로 훌륭한 캠핑장이었다. 언니와 나는 캠핑용 의자 두 개를 얻어 그들이 노니는 곳으로부터 멀찌감치 앉아 지켜보았다. 영하로 떨어진 기온. 가끔 눈발이 날리고 하늘은 파랗게 얼어 살짝만 건드려도 쩍, 하고 갈라질 것처럼 투명했다. 바람이 한차례 불었을까. 세 살짜리 꼬맹이가 통유리가 있는 쪽으로 가서는 유심히 밖을 내다보았다. 언니와 나는 아이의 꽁지머리 뒤통수와 그 아이가 바라보는 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이는 사냥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약간은 긴장한 자세로 주의를 집중했다. 우리도 꼼짝 않고 아이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쩌다 서로의 눈만 마주볼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아이가 목표물을 향해 질주하듯 갑자기, 크게 소리 질렀다.
“우와, 고모! 고래야~”
“고래?” 아이의 고모와 나와 언니와 그 아이의 오빠는 동시에 “고래?” 하고 달려가 통유리 밖을 내다봤다. 그때만큼은 언니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고래라니? 우리는 아이가 말하는 고래가 진짜 고래인지, 발음이 서툴러 그리 들린 건지 몰라 아이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모, 저기 고래. 저기에 고래가 있어.”
아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가 가리킨 곳엔 눈바람에 얼어버린 빨래처럼 열 마리의 명태가 덜거덕 덜거덕 소리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웃을 수도 호들갑떨 수도 없는 상황. 우리는 그저 “아구, 그래. 고래였구나. 고래가 왔구나.” 하며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 눈에는 명태가 고래처럼 커서 고래라고 한 것일까, 명태 생김이 고래 같아서 고래라고 했을까. 고래라고 좋아하는 아이를 보고 저것은 고래가 아니고 명태라고 명확히 말해주기에는 현실적 괴리가 너무도 컸다. 저 아이의 오빠라면 흔들리는 명태가 생태였는데 동태가 될 수도 있고 황태도 될 수 있으며 중간에 코다리도 될 수 있다는 보도식 설명이 가능했을 테다. 꼬맹이한테는 한번 고래면 그냥 고래여야 한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바다를 나는 꿈이었다. 우리 아가는 고래 모자를 쓰고 구름보트를 타고 있었다. 나는 명태 모자를 쓰고는 아기가 타고 있는 구름보트를 밀어주면서 기다란 미역으로 물속 파도를 갈랐다. 물살이 갈라지는 틈으로 내가 날았다. 날개가 없어도 물에서는 나는 일이 가능했다. 수영을 배운 적 없는데도 영락없이 물에서 뜬 채로 날았다. 내가 수영 못하는 걸 알고 있는 언니는 대견하다며 물 밖에서 박수를 보냈다. 꿈속에서도 나는 언니가 빨리 나았으면 빌었다. 언니는 다 나았으니 걱정 말라며 이대로라면 코다리가 제 맛을 낼 수 있겠다고 했다. 나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언니를 쏘아봤다.
언니가 코다리 요리를 완성했다고 우리를 불렀을 때는 다음 날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할머니가 고래를 사냥해서 만든 요리라고는 차마 말해줄 수 없었다. 어차피 코다리찜은 아이들 반찬이 못되었다. 나도 매워서 그것을 먹지 않았다. 다 큰 어른이 편식한다고 조카들이 놀렸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잠이 덜 깬 듯 정신이 몽롱했다. 분명한 건 하룻밤 사이인데도 언니 혈색이 전날과 많이 달라졌다. 모처럼 식구들을 위해 요리를 해서였을까. 손녀딸 덕분에 오랜만에 실컷 웃어서였을까. 그것이 무엇이라도 나는 좋았다. 그건 언니가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날 우리 아기가 본 것은 진짜 고래였는지도 모른다. 철봉에 걸려 눈바람 맞고 덜거덕거리며 춤을 췄던 고래는,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라고 언니한테 신호를 보낸 게 분명하다. 예부터 고래는 인간을 보호해주는 존재였다지 않나. 순수를 잃어버린 우리한텐 보이지 않는 세상. 아기는 모든 빛과 그림자를 순간 속에서 읽은 것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보인다고 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