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러포즈 / 유병숙

 

 

 

“당신을 스카웃하고 싶어. 짧으면 30년, 길면 50년.” 남자가 말했다. 나는 난생처음 대하는 밀어를 알아듣고 말았다. 그는 지금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시간이 물처럼 흘러갔다. 핑크빛 구름 위로 붕 뜨게 했던 말에도 세월의 먼지가 내려앉았다.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날, 나는 뜬금없이 그이의 프러포즈를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암입니다.” 의사의 판정이 떨어졌다. 순간 남편이 나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예상과 다른 결과지를 받아 든 그는 난감한 마음을 웃음으로 감추었다. “오늘부터 암 환자로 등록되니, 수속을 밟아….” 의사의 말이 송곳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오래전 시어머니와 시누이도 위암 수술을 했다. 왜 그이마저! 무슨 음식이든 잘 먹고 여간해서 탈이 나지 않던, 다른 건 몰라도 위장 하나는 튼튼하게 타고났다고 큰소리치던 그이였다. “괜찮아, 위암은 완치 확률이 높다잖아. 수술하면 어머니처럼 괜찮아지겠지. 걱정 말아.” 오히려 그이가 나를 다독였다.

1기로 예상했던 의사의 진단이 정밀 검사 후 3기로 바뀌었다. 남편은 임상시험 대상자에 선정되었다. 먼저 암의 크기부터 줄인 후 수술하잔다.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망연자실했다. 예! 예! 하면서 의사의 지시를 숙지하고 있는 그이를 바라보았다. 무섭기는 매한가지일 텐데…. 태연자약한 모습이 측은했다.

불쑥 남편의 프러포즈가 떠올랐다. ‘짧으면 30년, 길면 50년’이라 했겠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주술처럼 자꾸만 되뇌어졌다. 올해가 결혼 몇 주년이지? 더듬더듬 숫자를 헤아렸다. 딸애 나이보다 한 해 먼저였으니, 한데 딸이 몇 살이더라? 남편은 왜 그러냐며 갈팡질팡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편과 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지난 세월 살아내느라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작년 결혼기념일 축하 케이크 위에 얹어졌던 촛불 숫자가 간신히 생각났다. 너무 많아 몇 개 빼자고 호들갑 떨던 게 어렴풋했다. 약속은 ‘짧으면’을 넘어 ‘길면’으로 빠르게 행진 중이었다.

프러포즈 받을 당시 나는 똑 부러지게 숫자를 제시하는 남자에게 매혹되었다. 재치로 미루어 보건대 같이 살면 재미나겠다 싶었다. 예상은 빗나가기 일쑤였지만 설렘은 유효했다. 30주년이 되었을 때 벌써? 하고 놀랐지만 ‘짧으면’을 무사히 지나온 데 까닭 없이 안도했다.

금혼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숫자에 매달려보았다. 믿음직했던 말들이 되살아났다. 허언할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났다.

시어머니와 암 병원에 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말기 암이었지만 수술 후 다행히 전이 소견이 없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5년 동안 병원을 드나들었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나들이 가듯 들뜨곤 하셨다. 의사가 “어머니 오셨어요? 지난번에 뭐 드시고 오라 했지요? 숙제하셨어요?” 하면 볼이 발그레해지시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남편과 합세하여 맛집 순례에 나섰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도 그랬듯이 이 난관도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왜 암이 왔을까?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라는 생각으로 감정을 낭비하지 말아. 바람이 불듯 그냥 온 거야, 아무 이유 없이.’ ‘보호자의 덕목은 포기하지 않는 것, 힘내!’ 친구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래, 용기 내어 끝까지 버텨볼 요량이다. 나는 이미 양가 부모님 네 분을 간병한 바 있지 않은가?

남편의 병세를 살피느라 내 눈이 곤두섰다. 항암제로 인해 얼굴색이 나날이 검어졌다. 홀쭉해진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 피어났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세하게 바라본 게 얼마 만인가?

화장품을 남편 얼굴에 발라주고 영양 팩을 덮어 주었다. 남편이 도리질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니 성심껏 관리하여 원상복구 해 놓으라고 지청구를 해댔다. 바를 때마다 난색을 보였던 그는 이젠 스스로 알아서 화장품을 바른다. 좀 좋아졌나? 하며 볼을 한껏 부풀리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항암치료 중 그는 음식을 토해내기 일쑤였다. 힘든 기색이 역력한데도 불안, 원망 등 환자가 겪는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이의 입술은 한없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입꼬리를 올려주자고 마음을 먹었다. 내 말을 따라 해 봐! 하고 말을 건넸다. 응? 하고 그이가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이는 에이,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시 반복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또박또박 따라 한다. 그이의 환한 웃음에 내가 더 위로를 받는다. 문득 옛 시절로 돌아가 나도 그대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간절하게 화답하고 싶다.

그런데 왜 그이는 ‘길면 50년’이라고 했을까? 남들처럼 두루뭉술하게 백년해로 하자고 했으면 새삼 숫자놀음으로 애태우진 않았을 것 아닌가. 백 세 시대가 이렇게 빠르게 다가올 줄 그때는 미처 몰랐으리라. 욕심 같아선 ‘길면’을 수정하라고 떼쓰고 싶다. 60년, 70년? 아니 그 이상으로 늘려 놓으라고. 지금까지도 그러했지만, 그이는 내 맘을 졸이게 하는데 선수임이 분명하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