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치의 눈물 / 조헌

 

 

드르륵 방문이 열렸다. 이마에 수건을 동여맨 덩치 큰 주방장이 도마 위에 수박만 한 참치 머리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잘린 부분을 밑으로 둔 채 입을 하늘로 향한 그것은 회갈색을 띠고 있었다. “오늘 회 맛은 맘에 드셨습니까? 눈다랑어 머립니다.” “아주 좋았어! 그동안 먹었던 것 중 최고야! 고마워, 김 실장!” 오늘 모임을 주선한 친구는 만 원짜리 두어 장을 그의 손에 쥐여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신바람이 난 그는 능란한 솜씨로 참치 머리를 해체해 나갔다. 그러다가 모양과 색깔이 각기 다른 머릿살 두 점씩을 각자의 접시에 놓아주며 “이 건 기름장에 찍어 드시고, 이 부위는 특별히 드리는 참치 내장젓갈로 잡수셔야 제맛입니다.” 아주 비밀스럽고 오묘한 별미를 우리에게만 주는 듯 의기양양 검은색 젓갈을 조금씩 떠서 회 위에 올려주었다. 난 비릿한 젓갈 냄새에 살짝 비위가 상했지만 “와! 입에서 살살 녹네, 완전 천상의 맛이네그려!” 감탄사를 연발하는 친구들의 호들갑에 우물우물 씹다 말고 꿀떡 삼켰다. “이젠 참치 눈물주(酒) 한 잔씩 하셔야죠? 제가 기가 막히게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그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회칼을 획하니 돌려 잡고는 참치 눈언저리에 푹 꽂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알을 도려냈다. 이윽고 야구공만 한 덩어리가 도마 위에 놓였다. 우린 그의 엽기적 손놀림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숨을 죽여 가며 바라보았다. 그의 빨갛게 얼은 손이 그걸 요리조리 돌려가며 꼼꼼히 발라내자 드디어 탁구공만 한 수정체가 하얗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걸 들어 보이며 자랑스러운 듯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흰색 수정체는 다시 잘게 다져졌다. 얼었던 것이 녹으며 끈끈한 점액질로 바뀌었다. 그걸 사람 수만큼의 소주잔에 배분하더니 거기에 소주를 부어 우리에게 건넸다. 이게 참치 눈물주란다. 눈알을 다져 넣고는 눈물주라니 몬도가네가 따로 없었다. 저렇듯 눈알까지 파먹어야 하는지. 영 마땅치 않았던 난 술잔을 슬쩍 밀어내놓으며 딴청을 피웠다.

내가 알기로는 참치 눈물주가 좋다는 속설은 별게 아니다. 수정체 속에는 안 와 지방이 있는데 거기에 오메가3 지방산(DHA+EPA)이 많아 몸에 좋다는 게 그 근거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 참치의 여러 부위 중 눈알은 세균이 번식하기 가장 적합한 환경으로 좋은 성분을 섭취하는 이점보다는 세균을 그대로 먹게 되는 일이 더 잦아 굳이 권장할 만한 먹거리는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다. 게다가 식당 주방장들이 펼치는 묘한 마케팅 전략에 걸려들어 극진한 대접으로 오인하며 지갑을 여는 것도 쓸데없는 일은 아닐지.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새로운 별의 발견보다도 인류의 행복에 한층 더 공헌한다."라고 프랑스 미식가 브리야사바랭이 말했다지만 어지간해야 하지 않을까. 수없이 개발되는 요리에 사용하는 재료들이 다양해지는 요즘이다. 그 다양의 정도가 지나쳐 이젠 경악을 금치 못할 것들까지 넘쳐난다. 어미의 배를 갈라 아기집 속에 들어있는 새끼들을 꺼내 요리를 한다든지 깃털까지 만들어진 부화 직전의 계란이나 오리알을 먹는다든지 모기를 잡아먹고 사는 동굴 속 박쥐의 배설물을 뒤져 소화가 안 된 모기 눈알을 모아 수프를 끓여 먹는다고 하니 몸서리가 쳐진다.

게다가 원숭이의 골을 생으로 먹기도 하고 우리 속에 갇힌 살아있는 곰의 쓸개에 빨대를 꽂아 즙을 빨아 들이는 일은 듣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만큼 끔찍하다.

동물은 ‘먹이’를 먹는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먹이’라는 단어 대신 ‘음식(飮食)’이란 말을 쓴다. 모든 동물은 생존을 위해 자연선택에 따라 ‘먹이’를 구하고 그걸 섭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하지만 일부 인지능력이 발달한 동물은 먹는 것과 관련된 활동을 즐거움으로 여기기도 한다. 사람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품위 있는 ‘문화적’ 맥락에서 식이 행동을 발달시켜왔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먹어서 죽지 않으면 무턱대고 다 먹는다는 요즘의 먹거리 개념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불교에서는 흔히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하되 오신채를 삼가고, 발우 공양이라는 자연친화적 식사법을 개발해 소식(小食)을 권장해 왔다. 율장(律藏)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음식과 관련해 상당히 많은 계율을 정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음식을 구하는 방법부터 먹는 시간과 방식, 심지어 마음가짐까지 규정해 놓았다. 그 마음가짐은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공양할 때 염송하는 《소심경(小心經)》 ‘오관상념게(五觀想念偈)’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음식이 나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덕이 들어갔는지를 헤아리고, 나의 덕행이 공양을 받기에 부끄럽지 않은가를 생각한다. 나쁜 마음 끊으려면 탐·진·치 삼독(三毒)을 끊는 게 으뜸이다. 이 음식을 약으로 알아 육신의 고달픔을 치료하고,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음식을 먹습니다. (計功多少 量彼來處 / 忖己德行 全缺應供 / 放心離過 貪等爲宗 / 正思良藥 爲療形枯 / 爲成道業 應受此食)”

 

음식을 먹기 전에 음식에 깃든 많은 사람들의 공덕을 먼저 생각하고, 그 음식을 먹기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을 했는지 되돌아보며 도를 성취하기 위한 약으로 알고 먹어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면서 이 게송의 내용을 일일이 염두에 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지만 아무거나 무자비하게 먹는 일만은 삼가야 하지 않을지.

전설적 요리사 오귀스트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는 “먹는 법을 아는 게 사는 법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는 법을 아는 게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나 그저 상식적이고 평온하게 살고 싶다. 늘 먹던 그대로 나물 반찬 두어 개에 따뜻한 국 한 그릇, 그리고 막 지은 밥 한 사발 속에서 사는 기쁨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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