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아름답고 무용한 / 정윤규

 

 

동네에 서점 하나가 생겼다. 그곳은 몇 해 전까지 노인이 담배나 생필품 정도를 팔던 작은 가게였다. 골목 상권까지 편의점이 밀고 들어오자 폐업한 채 오래 비어 있었는데, 뜬금없이 책방이 들어섰다. 언덕진 골목길을 내려가면 대학교가 있긴 하지만 주택가 한복판에 들어선 구멍가게만 한 동네 서점이라 반가운 마음보다 걱정이 앞섰다. 하루에 몇 권이나 책이 팔릴지.

낡은 유리 미닫이문 위에 무심하게 쓰인 '아름답고 무용한 책방'. 서점 이름에 '무용(無用)'이란 단어를 쓴 주인의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오래된 출입문에 비해 서점 안의 분위기는 밝고 경쾌했다. 푸른 벽과 붉은 벽돌로 만든 서가가 산뜻하게 어울린다. 가운데 놓아둔 나무 탁자와 작은 의자 몇 개, 벽에 걸어둔 소소한 소품들이 서점이라기보다는 아늑한 서재처럼 보인다. 책 한 권을 찾기 위해 수많은 알파벳 사이를 넘나드느라 마음이 먼저 피로해지는 대형 서점에서는 분명 느껴보지 못하는 고요하고 평온한 공간이다.

서점 앞을 지날 때마다 창문 안의 기척이 궁금했지만, 손님이 있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저녁나절 불빛이 비치고 어쩌다 창문 안에 사람이 보이면 마치 내가 맞은 손님처럼 반갑고 안도가 되었다. 몇 번 들르지 못하고 얼마 뒤 다른 동네로 이사를 오면서 골목길 책방도 조금씩 기억에서 멀어졌다.

그곳이 다시 생각난 건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라는 책을 읽으면서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주택가 후미진 골목길에 위치한 서점.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동네 책방을 연 젊은 여주인. 책과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또 다른 희망을 꿈꾸는 그녀들의 모습이 어딘가 닮아 보여서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기계의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많아서일까. 세계를 휩쓴 전염병으로 인한 단절을 경험한 때문일까. 몇 해 전부터 책을 통해 위로받고 휴식을 얻는 '힐링 소설'이 유독 유행한다. 이 작품을 쓴 작가도 대기업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선지 번아웃 증후군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동네 책방을 운영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주인공 영주의 모습에선 작가의 자전적 모습도 많이 투영돼 보인다.

휴남동 서점에는 이런저런 사연들로 상처를 입고 고민을 가진 다양한 인물이 나온다. 그들은 열심히 일해도 계약직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치열하게 준비해도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았지만 회사에서의 불균형한 삶에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저마다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동네 책방에 모여 서서히 마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상처를 치유 받고 또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청년들이 살아가는 각박한 현실과 그들의 고민 그러나 슬픔 속에 함몰되지 않고 다시 세상에 부딪히고 성장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을 읽으며 생생하게 전해 듣는 느낌이었다. 지독한 상처를 받으며 무너지는 것도 인간관계 때문일 때가 많지만, 세상을 마주하고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는 것도 결국 내 옆에 있는 좋은 사람들과의 진솔한 관계를 통해서라는 걸 새삼 생각해본다.

마음이 지친 어느 하루 불쑥 찾아들어도 평안한 쉼터가 되고, 책과 커피가 있고, 많은 말 하지 않고도 정다운 눈빛만으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동네마다 이렇게 정겨운 공간이 있다면 도시에서의 삶도 훨씬 온기가 흐를 텐데.

동네 책방에 마음이 더욱 끌렸던 건, 이름도 한몫했을 것이다. 서점 앞을 지날 때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낱말의 조화를 생각했다.

'아름답고 무용하다'

방영이 끝나고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여주인공의 약혼자로 나오는 김희성은 이런 독백을 한다. "내 원체 이리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뭐 그런 것들..." 드라마를 보면서 감각적이고 뭉클한 대사가 많아 자주 가슴이 뻐근해지곤 했는데, 그가 무심한 듯 내뱉는 이 독백 장면이 오래도록 잔영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옆에 있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그 존재의 아름다움을 자주 망각하고 살고 있지는 않을까.

'무용한 것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준다(...) 예술이 자유로운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평론가 김현도 말한다. 문학 또한 아름답고 무용한 존재이다. 세상에는 쓸모 있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용해서 더욱 아름다운 것도 많아 보인다. 글 한 편을 쓸 때마다 자판을 노려보며 머리를 쥐어뜯는 나도 결국 무용함의 가치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나의 글이 누구에게도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내 삶을 밝히는 희미한 등대불 같은 것이니까.

다시 찾아가 본 골목길 책방은 이미 폐점한 뒤였다. 오래된 미닫이 유리창엔 여전히 이루지 못한 꿈의 잔해처럼 '아름답고 무용한 책방'이라는 이름만 쓸쓸히 남아있다. 서점이라는 공간이 점점 설 곳이 없어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책방지기는 그곳이 동네의 쉼터이자 사랑방이 되고, 달, 별, 꽃, 바람, 웃음처럼 책과 문학 또한 사람들의 일상에 꽃처럼, 바람처럼 스며들기를 바랐을 테다. 아무리 무용함의 가치를 사랑한다고 해도 결국 세상은 유용함만을 좇는 게 아닌가 싶어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마음이 적막해졌다.

이 골목에서는 비록 그녀가 품었던 아름다운 뜻을 펼치지 못했지만, 어디에선가 책과 사람이 다정하게 소통하는 행복한 서점에서 자신의 희망을 계속 펼쳐가고 있는 그녀를 꼭 다시 보고 싶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