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장인 제삿날이면 형제들은 읍내 큰 처남 집에 모인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여인네들은 음식 준비에 부산하고, 큰 처남은 날밤 치랴 돔배기 꿰랴 여념이 없었다. 나와 아랫동서 셋은 열 세평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 술잔을 나누며 회포를 풀고 앉았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권커니 잣거니 서둔 탓에 일찌감치 얼큰해졌으며, 제사 지낼 자정까지 서너 시간을 죽여야 하는 지루함에 배배 꼬인 그때였다.
“행님들 나가시죠.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서울 막내동서가 속삭인다. 그는 재봉틀 부속 전문점 사장으로서 돈을 잘 번다. 안 그래도 화려한 서울 얘기로 호기심이 동해 있던 우리는 얼씨구나 하며 답답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어수선한 틈을 타서 삼베바지 방귀 새듯 하였으니 눈치를 챈 식구는 없을 듯했다. 우리는 가로등 희미한 도로를 건너 간판 벌건 술집으로 향하였다. ‘여인 천하’, 네온사인 간판 속 아리따운 여인이 어서 오시라 반긴다. 쇠락해져 가는 시골 읍이라 해도 뭔가 재미있을 듯했다.
“아줌마, 아가씨 있어요?”
졸다가 깬 듯 부스스한 아줌마에게 서울 동서가 물었다.
“여는 노래방이구마, 지하로 가보소.”
내려선 ‘여인천하’는 봄밤에 어울리게 홍등이 은은했다.
“어서 오이소.”
지배인인 듯싶은 사내 혼자서 우릴 맞는다.
“아가씬 없네.”
여인들 천국인 줄 기대한 내가 혼잣말을 했다. 저 아래 ‘삼천궁녀’로 갈 걸 잘못 왔나?
“아이고, 금방 불러 드립니더.”
서울 동서가 그런 사내와 흥정을 하고 온 듯 뒤늦게 룸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멀뚱멀뚱 두리번거려가며 양주 반병을 비웠다. 아무리 돈 많은 동서가 쏜다 해도 염치가 있지 그래, 아가씨도 오기 전에 싹 비워서야 쓰나.
“보소, 아가씬 언제 오는 교?”
“아, 예 곧 옵니더.”
이거야 원, 중국집 자장면 기다리듯 하다. 그렇게 또 얼마나 지났을까.
“실례합니다. 노양입니다.”
실례 실례하세요, 여덟 눈이 한꺼번에 꽂혀 따갑겠다. 그런데 좀 덜 생겼다.
“행님이시다. 잘 모셔라.”
서울 동서가 나를 챙긴다.
노래가 시작되자 동서들은 그 아가씰 내게 밀고, 나는 못 이기는 척 안고 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가씨와 어깨동무를 한 채 목청을 뽑았고, 동서들의 추임새는 착착 들어맞았다.
“대장군 잘 있거라(사이사이) 다시 보마 고향산천(한나 두울 서이 너이)
과거보려 한양천리(하이하이) 떠나가는 나그네에(염새이 물똥 찔뚝 싼다, 돈 만 내고 술만 묵자) 내 낭군 알성급제 천 번 만 번 빌고 빌며(자야~ 안주 한 사라~) 청노새 안장 위에 실어주던 아~ 엽전 열 다안냐~앙♬(숙아~물 타라~) “
“행님, 우리 이래 삽시다.”
앗! 따가라, 둘째 동서가 해롱해롱 껄끄러운 수염으로 내 얼굴을 비빈다.
“안녕하세요. 박양입니다.”
잠시 뒤 또 다른 아가씨가 들어서자 둘째 동서는 기다렸다는 듯 이리 오이라! 손을 맞잡는다. 통통한 모습이 딱 내 스타일이다. 남의 떡이 크게 보인다더니 내가 그 짝이다. 에라! 못 참겠다. 술기운을 빌어 나는 소리쳤다.
“바까라!”
순간, 노래가 따로 놀고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행님 아니던가.
“바까라 안 카나.”
떫기야 했겠지만 파트너는 바뀌었다. 그럼 그렇지 싶은 나는 신이 났다. 사람 좋은 둘째는 마음을 비웠는지 십팔번으로 시동을 살렸다.
“천둥사~안 박달재 러~얼♬(살리고 살리고)”
한 소절이 겨우 끝났을까,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고함이 들렸다.
“나온나, 좋은 말 할 때!”
“거 있는 거 다 안다~”
우리는 쉿! 쉿! 서로를 멍하니 보면서 귀를 세웠고 아가씨가 얼른 반주기를 껐다.
“지깃뿔라, 안 여나~”
손위 처남이자 울산 사는 초등학교 동창 녀석이다. 이런 낭패가 있나, 저 인간이 딴 방에서 자빠져 자더니 여길 어찌 알고 왔을꼬. 처제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벚꽃장이 따로 없는 듯하다. 살아생전 대쪽 장인을 빼닮은 녀석은 여동생들을 지키려는 홍도 오빠나 되는 듯했다. 이런 된장, 서울 처제가 차 열쇠 가진 신랑을 찾다가 얼떨결에 우릴 발견했다나 뭐라나. 이러쿵저러쿵하는 말들이 흡사 도떼기시장처럼 난무한다. 팔짱 낀 처제들 모습은 자못 당당하다.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한 그 날 밤, 서울 동서는 돈만 허황하게 날렸다. 제삿집으로 복귀한 우린 패잔병 같았다. 마누라는 물론 처제들의 눈초리는 매우 따가웠고 우리는 아무 짓도 안 했노라 침이 말랐다.
어찌어찌 제사는 끝났다. 어색한 분위기 탓인지 어느 해보다 음복이 길어졌고 우린 또 알딸딸해졌다. 식구들은 말이 많아지고 둘째 동서가 술에 못 이기자 처제가 베개를 고여 주며 묻는다. 그는 잠꼬대 중에 대화가 되는 사람이다. 택시에 오를 때 구두를 벗고 탄 적이 여러 번이며 대구에서 내려야 할 기차를 부산까지 뻗쳐 탄 주태백이기도 하다.
“영이 아바이, 누가 먼저 가자 캔노?”
“광바우 동서.”
바람은 잡았을지 언정 가자 한 건 서울 동서긴 해도 손위 된 체면에 나는 입을 닫았다. 온 가족은 불륜 사건 청문회를 방청하듯 흥미로워 죽겠단 표정들이다. 배웅해 드렸던 장인어른 혼백도 발걸음을 돌려 좌정하신 것 같았다.
“가가 머 했노?”
“음냐, 술 뭇따.”
“술마 뭇나?”
“노래도 불렀다.”
“노래마 불렀나?”
대답이 없다. 코를 쿨쿨 곤다.
“이 영감재이가, 자나?”
“쩝쩝, 안 잔다.”
퍼뜩 잠이 엷어진 모양이다.
“본전 좀 뽑제 와?”
“○○꺼 광바우 동서가 가스나 바꾸라 캐가 가.”
“뭐시라?”
“아이 쉬바, 지가 뭔데….”
이 인간이 보자보자 하니 형님이 보자기로 보이나, 취중이랍시고 못할 말이 없다. 갑질한 나도 그리 잘 한 건 없고 보면 나무랄 계제는 아니어서 한마디로 눙쳤다.
“에이, 상종 못 할 인살세, 좋다 할 땐 언제고.”
제삿날이라 애써 눌러 참던 웃음보가 봇물 터지듯 터지고 말았다. 장인어른 혼백도 덩달아 흐뭇해하셨을 게 분명하다.
둘째 처남 홍도 오빠는 그로부터 몇 달 뒤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여인천하의 추억 한 자락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는 노모를 앞선 불효를 저지른 채 고향 땅 ‘질매질고개’에 묻혔다. 그를 보내던 날, 앞소리꾼의 저승 소리에 만감이 교차한 우린 자꾸 눈물이 났다. 천 날 만 날 함께 살 줄 알았더니 황망하게 떠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있을 때 잘 하란 노래가 까닭 없이 히트했을 리 없다. 인생은 지나간다고 하였던가. 우리는 가끔 그 일을 회상하며 얘기꽃을 피우고, 다시 못 올 그때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MBC라디오방송 ‘여성시대’ 방송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