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경강 둑길을 따라 출퇴근한다. 도로 폭이 좁은 게 흠이지만 신호등이 없고 풍경이 한가하다. 시속 40~50킬로미터 전후의 속도도 여기서는 과속이다. 나비가 유리창에 부딪친 일은 수없이 많고, 개구리와 뱀이 길을 건너는 걸 보지 못하고 지나갈 때도 있었다. 어느 가을에는 청둥오리하도고 충돌할 뻔했다.
아슬아슬한 시간은 가끔 예고 없이 찾아온다. 며칠 전에는 50미터 앞쯤에 어린 새 한 마리가 쪼르르 길을 건너는 걸 발견했다. 그랬더니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놈이 태연하게 되똥되똥 따라 건너고 있었다. 앞선 녀석이 무사히 건너갔으니 여유를 부려보는 걸음새였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두 마리의 어린 새들이 지나간 자리에 차를 멈추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놈들이 튀어나온 풀숲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강변 쪽 그 풀숲에 눈이 말똥말똥한 또 다른 놈이 길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논병아리였을까.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형제자매 새들은 나라는 인간 때문에 얼마나 기겁을 했을까.
장끼와 까투리 연인이 길을 건너는 걸 지켜본 저녁도 있었다. 뒷짐 진 것처럼 걸음걸이가 느려 질투 날 정도였다. 속도를 줄이면서 물어보았다. 장서방, 어디 가는가? 우리는 저녁 먹고 산책 간다네. 어디 좋은 데 가는가? 허허. 자네는 알 바 없네. 둘은 풀숲으로 그만 총총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칫, 산책이 목적이 아니었구만!
갑자기 천국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이 나무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나뭇가지 위에 새처럼 모여 앉아 조잘대기도 하고, 손으로 가지를 잡고 몸을 흔들어대는 녀석도 있었다. 나무는 대여섯 명이 올라가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해 보였다. 얼마나 많이 오르내렸는지 나무줄기는 반질반질했고 잎은 무성했다. 그때 이중섭의 그림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소와 새와 물고기와 게를 껴안고 노는 그림들 말이다.
그 그림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저절로 무장해제되곤 했지. 그림으로 보던 천진난만의 해방구가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감동할 수밖에. 아이들이 내게 손짓을 보내왔다. 나무 위로 한번 올라와보라는 거였다. 그렇지만 나는 나무에 오를 시기를 놓쳐버린 다 큰 어른일 뿐이었다. 수년 전 중앙아메리카의 코스타리카를 갔을 때 어느 시골 초등학교에서 만났던 풍경이다.
나무를 잘 타는 아이가 없다. 요즘은 아이들이 아에 나무에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나무에 오를 시간을 뺏어버린 어른들 탓이다. 도심 공원에서 어떤 아이가 나무에 기어오른다고 해보자. 어른이라는 이름의 관리인이, 부모가, 지나치던 행인이 손사래를 치며 말릴 것이다. 과잉보호다. 수피를 만져볼 기회를 얻지 못한 아이들의 상상력은 말라가고 창의력은 어설퍼진다. 한 코스타리카 아이가 자기가 쓴 시를 보여주었는데, 엉뚱하게도 발상에 나는 무릎을 쳤다.
소가 날아간다.
산에 부딪쳤다.
쿵, 하고 떨어졌다.
아,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