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가장 부러워하며 소망하는 물건은 가방입니다. 남편이 로또에 당첨되었을 때 부인의 반응을 살핀 모 방송국 가상극假想劇에서 확인된 사실입니다. 남자들은 사뭇 다릅니다. 내가 아는 젊은 농부는 트랙터나 경운기 등 온갖 장비들이 즐비하건만 지게차까지 원하는 모양입니다. 소일거리삼아 논마지기에 불과한 농사를 짓고 사는 내가 승용차에 정신이 팔린 건 당연한지 모르겠습니다.
친구가 새 차를 뽑았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후진 차로 견딘 보람을 만끽하는 모습이 어른거리자 나도 차를 바꾸고 싶은 욕망이 바짝 쳐들었습니다. 눈독을 들인 새 차는 기본에 몇 가지 옵션을 더한 값만 해도 비쌌습니다. 탁송료, 취득세, 공채, 증지대, 번호판 비용, 등록 수수료와 단기 의무보험료가 덕지덕지 추가될 테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황새를 쫓다가 다리 찢은 뱁새 꼴 날까 걱정이 된 나는 중고차로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인재로 쓰기 위해 세 번을 찾아갔대서 삼고초려三顧草廬라 한다지요. 공들일 게 사람뿐이겠습니까. 중고차가 탐나서 한양을 두 번이나 오르내린 얘기입니다.
천 리 한양 중고차 쇼핑몰을 들렀다가 헛물켜고 되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습니다. 이왕이면 새 차 사라는 지인의 만류 때문이었습니다. 돈 아껴뒀다 저승 갈 때 쓸 일 있소, 뭘 믿고 중고차 사려 하느냐면서요. 얼핏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형편대로 살아야지 싶었습니다. 모자라는 돈을 변통하려고 전화를 넣은 것이 살짝 후회되었습니다. 얼떨결에 되돌아오긴 했어도 미련이 짙어진 나는 인터넷으로 계속 그 차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아 다행이다, 아직 있네. 결함이 있었나, 비싼 탓인가, 왜 안 팔리지? 등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호회 게시판에 내가 눈여겨보고 있는 차에 대하여 정비경력이 10년이란 회원의 글이 떴습니다. 자기가 본 중고차 중 가장 상태가 좋은 매물로서 엔진 소리가 조용하며 차륜이 좋은 데다 타이어의 편 마모가 없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얼씨구나! 싶은 나는 아내를 불러 모니터에 손가락 줄을 그어가며 설명했습니다. 아내는 들뜬 나를 진정시키며 차분히 말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데 그 사람은 왜 안 샀을 꼬”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말문이 막히자 아내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좀 더 살펴보소.”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나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온통 차 생각에 빠진 며칠간은 그야말로 방앗간 드나드는 참새처럼 뻔질나게 홈페이지를 살폈습니다. 그러던 중 그 사람의 또 다른 동호회 게시 글에서, 차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아 포기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여보 이리 와 봐.”
성화에 못 이긴 아내는 항복을 선언하였으며 나는 만세를 불렀습니다. 쇠뿔 뽑듯 단김에 나선 천리타향 한양길이 또 즐겁습니다. 옜다, 소나 타라. 몰고 간 차를 소팔 듯이 헐값에 넘기고 운전석에 앉았습니다. 시커먼 가죽 의자야 새 주인을 넙죽 반겨 감싸듯 했지만 새 직장에 출근한 듯 낯설고 어설픕니다. 경황없이 두리번거리며 이것저것 건드려보는 내 모습이 어리바리하게 보였는지 젊은 중고차 딜러가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봅니다. 그렇지만 이까짓 거! 싶어 호기롭게 말했습니다.
“일 보소 고마.”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듯 도도하게 흐르는 차량의 물결에 차를 밀어 넣었습니다. 팔아먹어 시원한 듯 체면치레를 끝낸 딜러의 모습이 백미러 뒤로 멀어집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우선 Miss 내비게이션을 찝쩍거려봅니다. 앙탈을 부리네요. 그럴 줄 알았지요. 아내 표정이 어둡습니다. 비상 깜빡이를 켠 채 갓길에 세웁니다. 그야말로 비상입니다. 아무 버튼이나 막 눌러봅니다. 에어컨이 돌고 라디오가 멋대로 떠듭니다. 내비게이션이 안 되면 까막눈인데 하이에나 같은 한양 땅 빠져나갈 길이 막막합니다. 고분고분 말 잘 듣던 소나타 그녀가 그립습니다.
“돌아가자, 딜러한테.”
작동법을 배워서 출발하자는 아내의 말을 귀 흘려듣습니다. 사실 돌아갈 길도 모릅니다. 두툼한 안내 책자를 엄벙덤벙 뒤적여 보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고정관념을 깬 건 아내였습니다. 목적지 경로 관리 판을 희한하게 눌린 덕분에 고속도로에 올라탔습니다.
“마누라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 생기는 거 맞제?”
오물거리던 아내의 입이 비로소 벌어지고,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큰 덩치답게 차가 묵직하면서 점잖습니다. 힘차면서 예리합니다. 흡사 면도칼로 길을 짼다고나 할까요. S 코스를 좋아하는 아내가 좋아할 타입입니다. 지그시 밟아보니 시원하게 잘 나갑니다. 그런데 Miss 내비게이션은 아직 새 주인을 낯설어하는가 봅니다. 안내가 어설픕니다. 댕댕거릴 때마다 속도를 낮추긴 하는데, 과속단속카메라가 이동식인지 고정식인지 식별이 안 되니 답답합니다. 이동식 부스는 카메라가 비어있기에 십상이어서 속도를 줄이는 시늉만 해도 까딱없었거든요. 안내할 때마다 노래음량이 작아지는 것도 거슬립니다.
“죽이지 마! 제발, 에이~ 촌○ 같으니라고.”
아내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안내양 입을 막으면 노래가 제대로 나오는 줄은 며칠 후에 알았습니다. 때 빼고 광낸 날, 보호 비닐을 벗겨 주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습니다.
이웃들은 새 찬 줄 압니다.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윤냈으니까요. 그런데 주행거리계가 문제였습니다. 그새 2만㎞를 탔나? 하면 둘러댈 말이 없습니다. 물어본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조수석에 태울 땐 나도 모르게 계기판을 슬쩍 가리게 되더라고요. 중고차라 밝히기 싫은 입장을 헤아린 듯 지인이 입을 닫아 준 건 고마운 일입니다.
읍내에서 고스톱을 치고 집으로 오던 날, 자정이 넘은 시각에 아내가 차를 세웠습니다.
“와 이카노.”
말하면 부정 탄다는 듯 대답 대신 아내가 다리 위에 신문지를 펼치더니 북어 안주에 소주 일병을 깠습니다.
“아무 말 말고 절하소.”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미는 경우였지만 얼떨결에 넙죽 엎드렸습니다. 새 차 여럿을 부렸어도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나만 똑바로 운전하면 되지 고사告祀가 무슨 소용 있냐는 생각으로 살았지요. 그런 내가 중고차에 절하며 무사하길 기원하다니 나도 이젠 겁 많고 풀죽은 백성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날이 가고 달이 지나 흙탕물 가라앉듯 차분해졌을 때, 아내와 나는 새 차 산 셈 치고 남은 돈으로 업그레이드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포천에 가서 배기 촉매 장치를 끼웠더니 큰 덩치답지 않게 날렵해졌습니다. 연비도 함께 좋아졌지요. 부산에서 소리를 좋게 하는 장치인 ‘소리 약’을 달았더니 귀가 시원해졌습니다. '종소리'의 둔탁함에 비하여 ‘징글벨’의 까르르함처럼 극명해졌습니다. 무대 뒤 숨은 악기들이 톡톡 튀어나오는 듯했습니다. 마치 찌뿌둥한 기운을 날려 보내는 아스피린과 같았습니다. 맑고 서늘한 가을하늘처럼 아내와 나도 덩달아 개운해졌습니다.
오가는 길에 아내에게 명품가방을 선물한 건 일생일대의 사랑 고백이었습니다. 눈높이를 낮춰 중고차를 삼으로써 이 모든 걸 이룰 수 있었으니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욕심을 줄여서 욕심을 채운 격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이 중고차에 어울릴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