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세상 / 박완서

 

 

 

 

어떤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빌딩 로비에서였다. 한 중년의 신사가 여러 명의 초로(初老)의 신사를 뒤에 거느리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는 게 보였다. 그들은 곧 엘리베이트를 타고 사라졌지만 그 잠깐 동안에 본 그들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중년의 신사는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일관되고 있는 위엄과 아무나 닥치는 대로 깔아뭉갤 듯한 안하부인의 시선으로 미루어 사장님 보다 한 단계 높은 회장 쯤으로 보였고, 쩔쩔매며 뒤따르고 있는 신사들은 진득한 연륜으로 보거나 훌륭한 복장으로 보거나 중역진으로 봐서 틀림없을 것 같았다. 중역이 사장이나 회장한테 저렇게까지 굴어야 하는가 싶을 만큼 뒤따르는 신사들은 하나같이 아부와 비굴이 몸에 배 있어 차마 바로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고, 한편 우리네 가장이 밖에서 겪는 사회 생활의 굴욕적인 일면을 훔쳐본 듯 가슴 속이 찡하기도 했다.

마치 고층 빌딩의 층수 만큼이나 위로도 한이 없고 밑으로도 한이 없는 것일까. 하긴 밥줄이 달린 일인데 어쩌겠는가, 라고 간단히 체념할 수도 있다. 우린 자고로<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로 밥줄을 위해선 철조망 밑을 기는 것 같은 절대적인 비구까지도 합리화해 왔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달린 밥줄은 과연 중요하다. 신성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중역은 사장이, 과장은 부장이, 계장은 과장이, 청소부는 청소 감독이 멱여살리는 건 아니지 않은가. 청소부는 그가 맡은바 청소하는 일이 그를 먹여살린다고 생각하면 각자 좀더 떳떳할 수도 있지 않을까. 청소부가 청소를 특별히 게을리하고 있지 않는한 감독한테 비굴하게 아부할 필요는 없을 테고 더군다나 회장님이 지나간다고 해서 혼비백산, 벌벌 떨 필요도 없겠다. 비록 각자 맡은바 일의 중요성의 경중에 따라 직급의 높고 낮음은 있을망정 일을 한 댓가로 먹고 사는 입장은 서로 동등하다.

직급의 높고 낮음이 있는 한 그 위계질서를 위해선 의연한 웃사람 노릇과 아랫사람의 웃사람에 대한 존경심은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이겠지만, 내가 빌딩 로비에서 목격한 상하 관계는 그런 것 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아부와 비굴의 극치를 보여주던 그 초로의 중역이 잠깐 웃사람의 권위가 미치지 않는 곳, 이를테면 화장실 같은 곳에서 홀로 기를 펴게 되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내 더러워서-->하는 욕지거리가 고작일 것이다. 만약 그곳을 나오다 아랫사람을 만난다면 무슨 트집이든지 잡아 쩔쩔매는 꼴을 보고 싶어할 테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선 아내나 아이들에게 터무니없는 허세를 부리고 싶어할 것이다.

이렇게 표리가 부동한 건 결코 존경이 아니다. 또 남을 존경함으로써 자신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진정한 존경은 아니다. <내 더러워서-->라는 욕지거리가 목구멍에서 거래처럼 끓는 걸 참고 마는 야양과 존경을 구별 못하는 웃사람은 참으로 어리석다. 또 세상이 온통 그런 코미디 같은 상하 관계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매우 우울한 노릇이다. 우리를 먹여살리고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는 능력이 자기 밖의 어떤 가공의 힘에 있다고 믿고 거기 무조건 빌붙고 아부하는 기술이 근래에 더욱 발달하고 세련되어 <목구멍이 포도청>정도를 지나 가히 우상숭배의 경지까지 이르지 않았나 싶다. 그러면서도, 아니 그럴수록 우리는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적절한 갈망을 버릴 수가 없다.

우리가 모두 굶주리고 헐벗었을 때 꿈꾼 보다 나은 세상은, 일만 하면 배부르고 등 뜨실 수 있는 세상이 됐다고 믿으면서도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갈망은 오히려 헐벗고 굶주렸을 때보다 더하면 더하다.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하는 건 기독교 정신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정신이고,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갈망이란 바로 참으로 그리고 골고루 민주적인 사고와 생활 방법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이제 겉모양이 드높고 내부 장치가 으리으리한 고층 건물만 가지고 근대화를 뽐낼 게 아니라 그 속에 근대적인 정신을 담을 때도 되지않앗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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