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 반숙자
손가락을 베었다. 무채를 치다가 섬뜩하기에 들어보니 왼손 새끼손가락이 피투성이다. 순간에 일어난 일로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싱크대의 칼집에는 다섯 자루의 칼이 꽂혀있다. 냉동고기를 써는 톱니칼부터 고기를 다지는 춤이 두껍고 무거운 칼, 배가 나온 칼, 과일을 깎을 때 쓰는 과도 그리고 제일 앞자리에 두고 부엌일을 할 때 가까운 동반자가 되어주는 얍상한 칼이다. 이 칼이 일을 낸 것이다. 소독을 하고 반창고를 붙이고 소란을 떨며 이상한 낭패감에 휩싸였다. 치료를 해주던 남편은 새끼손가락이니 큰 지장은 없을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말을 믿고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고 행주를 빨아 널었다. 오전 일을 마치고 고무장갑을 벗자 속에 낀 면장갑 반이 뻘겋다. 피다. 사람이 피를 보면 이상반응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금세 가슴이 뛰고 머리가 띵해지면서 혼란이 왔다.
피는 사람의 혈액이고 바로 목숨과 직결된다는 데 무의식적인 연대감이 있는 모양이다. 내 아이가 세 살 때였다. 봉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에서 혼자 놀던 아이가 까무러치게 우는 소리가 났다. 빨래를 널다가 놀라서 달려갔다. 아이는 제 무릎을 가리키면서 자지러들었다.
종지를 엎어놓은 듯한 무릎에 봉숭아꽃잎이 붙어있었다. 필경 아이는 꽃잎을 피로 알고 본능적으로 죽음을 떠올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거나 어른이거나 피에 대한 인식은 그만큼 위험한 불안을 동반한다. 가까스로 진정을 하고 다시 치료를 하는데 피가 멎지를 않는다. 우선 지혈부터 해야 하는 것을 상처만 소독하고 싸맨 결과였다.
새끼손가락이라 대수롭지 않다던 말은 모르는 소리였다. 왼손 중에 제일 가장자리에 붙어 있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정도가 아니었다. 힘을 쓴다던가 물건을 집어 올린다던가 하는 일에는 쓸모가 적었지만 그 하나로 왼손전체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세수도 한손으로 청소며 설거지도 한손으로 하자니 불편하기가 말이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조물주가 신체를 양쪽으로 대비시켜 균형을 맞추고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두 개의 지체를 만들었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경이감이 들었다. 일상이 마비상태에 이르는 것은 고사하고 무엇보다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다섯 손가락이 각각 짚어야 하는 글자판이 있어 제대로 잘 짚어야 하는데 손가락 끝을 가분수마냥 잡아매 놨으니 시프트를 누를 때 다른 것까지 끼어 눌려 오자가 되는 것이다.
보름을 넘게 반창고를 붙이고 다니다가 풀었다. 홀가분하기가 날아갈 것 같다. 상처 난 부위도 거지반 아물었으니 어디 시운전을 해보리라고 컴 앞에 앉았다. 생각은 충분히 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아니다. 새끼손가락 끝이 자판에 닿는 순간 아찔하도록 통증이 오는 것이다.
끼니때면 칼을 쓴다. 내 손안에서 입속의 혀처럼 자연스러웠던 칼놀림이 서먹해졌다. 저것이 또 말썽을 피우면 일을 못 할 테니 조심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을수록 곁을 주지 않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내가 저 물건을 너무 허물없이 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과도를 써야할 때도, 생선을 다듬을 때도 만만한 그 칼을 들었다. 언제나 손잡이를 잡으면 상냥하게 온몸을 다 내맡기는 친근감이 좋아서였다.
칼을 생각한다. 칼의 생명은 자르거나 깎거나 다듬는 일이다. 반짝이는 은빛 몸을 비스듬히 뉘여 묵을 채치든가 뚝다리 국수를 썰 때의 날렵함이란 물 찬 제비 같지 않던가. 어디 이뿐인가, 의사의 손에 든 작은 칼이 질병을 떨쳐내고 새 생명을 부여하는 신비의 칼이듯 마디 굵은 어머니의 손에서 고락을 함께하던 칼, 쓰이는 이와 부리는 이가 호흡을 같이 할 때 명품의 진객을 창조하는 것이다.
요즘은 가전제품이 여러 종류가 나와서 분쇄기, 다지기 등 용도에 따라 쓰는 제품이 많다. 그럼에도 제품은 사다가 선반 위에 올려놓고 긴 안반을 내려 칼국수를 써는 이 마음은 도도히 흐르는 문명을 역류하는 나만의 향수가 아닐까 싶다.
다시 칼을 생각한다. 사람의 몸은 칼집이다. 누구나 똑 같이 잘 드는 칼 하나를 몸에 지니고 산다. 보이지 않는 이 칼은 잘 쓰면 상처를 봉합시키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남도 베고 자신도 베어 상처를 남긴다.
잘 나갈 때는 친구 같고 요긴한 물건이지만 덧들리면 상처를 안겨주는 위험한 물건이다. 친구도 칼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키고 친할수록 적정거리를 유지하여 서로의 사랑에 베이지 않는 지혜가 필요해서다.
또한 쇠칼이 낸 상처는 한두 달이면 아물지만 사람의 혀로 낸 상처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쉬 치유되지 않는 걸 보면 쇠붙이 칼이거나 말의 칼이거나 칼은 무섭다는 생각이 새롭게 든다.
아직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 새끼손가락은 또 하나의 경전으로 나를 타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