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에 관한 보고서 / 최장순
와작, 발밑에 들러붙는 불길한 소리. 아뿔싸! 주저앉은 집 한 채가 바닥에 눌어붙어 있다. 황급히 촉수를 집어넣은 몇 채의 집이 불안하게 나를 주시한다.
비 그친 숲을 산책하는 여유로운 나와 필사적으로 길을 횡단하는 달팽이 사이에 벌어진 예기치 않은 비극이다. 내겐 사소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청천벽력. 미처 길을 건너지 못한 달팽이들은 건너 풀숲으로 옮겨줄까 생각하다 이내 마음을 접는다. 그들만의 보법에 끼어든 나의 간섭은 무시무시한 공포일 것이다. 그것은 달팽이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선심. 그들의 의도는 헤아리지 않은 독선적인 베풀기다. 생명을 살렸다는 자만심이다.
‘등짐 진 느림보’ ‘흐릿한 눈의 잠꾸러기’ ‘어둠을 헤매는 방랑객’ ‘시간을 초월한 은자’ 등의 별칭들은 인간의 시각으로 달팽이를 바라본 것이다. 점액질의 길을 이끌고 숲을 횡단하던 그들의 기원을 안다면, 우리의 자만심은 달라질 것이다. 멸종 위기 속에서도 수억 년 동안 진화해온 달팽이는 300만 년쯤인 인류의 기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속도를 섬기는 인간은 ‘느림’을 경멸하기 시작했다. 느린 것은 뒤처짐이자 패배라는 인식이 달팽이의 보폭을 답답해한다. 하지만 그 작은 몸이 혼신을 다하는 걸음은 우리의 백 미터 달리기 속도다. 새는 날아서 가고, 말은 뛰어서 가고, 거북이는 네 다리로 기어서 가고, 달팽이는 제 몸을 밀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뿐이다.
속도의 경쟁에서 처진 이들에겐 달팽이의 보법이 지구전(持久戰)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행동이 재야 먹이를 쟁취하지만, 느려서 덕을 보는 경우도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빠른 움직임은 포식자의 주의를 끌기 마련이다. 먹고 먹히는 야생의 속성을 간파한 느림은 포식자의 눈에서 멀어진다. 경주에서 골인지점에 먼저 도착한 것은 속도로 승부한 토끼가 아니라 자신의 단점을 끈기로 이겨낸 거북이었다. 경쟁자가 오로지 자신인 완주와 저력을 달팽이에게서 배울 일이다. 달팽이의 시원은 고생대 캄브리아기의 바다였다. 그들은 조상들이 태어나 자랐던 바다를 찾아가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속도전이 아니라 지구전을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천적으로부터 보호받으면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안전한 거처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선형 집은 방어술과 관련되어 있다. 위험을 감지하면 재빨리 문을 잠근다.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다. 주위 환경과 어울려도 위장된 집은 비상사태가 해제될 때까지 열리지 않는다. 그만의 성(成)에서 몇 날, 몇 달, 심지어 몇 년까지도 죽은 듯이 잠을 잘 수도 있다. 등짐 진 달팽이의 이동식 집은 그런 점에서 완벽한 쉼터다. 군인은 텐트로 야영을 하지만, 그것은 임시 거처일 뿐이고, 짊어진 짐을 지하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몸을 누인 노숙자의 잠은 불안하다. 허리띠를 졸라맨 주택부금으로 겨우 쉼터를 장만하는 인간은 어떤가. 대부분 번듯한 집 한 채 마련하고 나면 생의 끝이 보이지 않는가.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면서 사물을 알아채는 달팽이는 타고난 감각의 소유자. ‘먼저 보고 먼저 쏘라’는 전투의 수칙으로 볼 때 난시와 난청은 생존에 부적합하다. 그러나 이 역시 인간의 생각일 뿐, 시각장애인의 지팡이처럼 큰 더듬이가 물체를 읽고, 작은 더듬이가 먹잇감을 찾는다. 보고 들어야만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에 비해 촉각만으로 알아채는 달팽이를 하등동물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사랑법은 특별하다. 암수 한 몸이지만, 서로 수컷이 되어 단단한 침을 큐피드의 화살처럼 정확하게 상대의 옆구리에 찔러 넣는다. 혹 사디스트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 뿔을 곧추세워 사랑하는 대상을 끊임없이 배려하면서 애정을 쏟는 다정한 몸짓이다. 무려 7시간이나 정성들이는 사랑은 성실과 신뢰가 바탕이다. 우례와 폭력은 없다. 뒤틀림이 끼어드는 인간의 사랑법과는 다르다.
일찍이 근친상간을 피해 우량한 후손을 만들어 내는 우생학(優生學)을 터득한 달팽이는 오랫동안 홀로 떨어져 있기도 한다. 제 처지에 맞게 자가 수정도 한다. 비상시를 대비한 그 번식전력이 수 억 년을 살아낸 비결일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유전자를 지켜나가는 이들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끝내 존재할 것이다. 인간은 이제야 겨우 ‘자기 복제술’의 첫걸음마를 때었을 뿐이건만.
달팽이는 온몸이 발이다. 바닥과 가장 가까운 밀착으로 땅의 기운을 빨아들인다. 온몸으로 세상을 읽는 생의 보법은 먼 순례길의 오체투지만큼이나 숭고하다. 직립보행의 인간이나 네 발로 걷는 동물에겐 뛰어넘지 못할 답이 있지만, 달팽이에게 넘지 못할 장애물은 없어 보인다.
푸른 채소를 먹으면 푸른똥을, 황색 채소를 먹으면 주황색 똥을 누는 채식주의자. 수천억을 횡령하고도 시침 뚝 떼는 인간에 비하면 얼마나 정직한가. 서른두 개의 이를 정기적으로 스케일링을 하고 충치를 때우고 임플란트 시술을 하는 인간과 달리, 만여 개가 넘는 이빨을 지녔어도 부드러운 혀처럼 보이게 하는 위장술. 뼈대 있는 것들이 목에 힘을 주거나 어깨를 세우는 반면,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놀라운 처세술이다. 몸집은 작아도 두려움 없고 지칠 줄 모르는 숲 속의 탐험가. 느림 속에 용의주도함과 위엄이 있다. 단호함과 자신만만함이 있다. 인간은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제 보폭을 잃어버리고 삶에 가속도를 붙여왔는가.
행여 다시 그들을 밟을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작디작은 근육 주름을 움직이며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는 축축한 길을 따라 여름이 꿈틀, 옮겨간다. 나도 그들의 오법으로 천천히 숲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