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간의 자유 / 오차숙


                   -대체로 커다란 과오의 밑바탕에는 교만이 깔려 있다- 러스킨 


설 연휴인데도 시댁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일주일 전, 아버님 제사 때 다녀왔다는 이유로 남편과 아이들만 다녀오도록 양해를 구했다.
며칠간의 연휴를 기대해 본다. 가족들이 부산행 열차를 탔을 무렵, 홀가분한 마음으로 청소를 하고 음악을 틀어본다.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구입하여 집안을 채워본다. 감정을 절제하며 흘러나오는 중년 여자의 음성이 겨울비처럼 마음을 적신다.
어쨌든 이 순간만큼은 조심스럽게 만지고 싶다. 현관문을 잠그고 초인종 소리에도 숨을 죽이며 두문불출할 계획이다. 세상은 풍성한 명절이지만 나의 설 메뉴는 냉장고 안에서 대충 처리하여 초라하기 그지없다. 여학교 입학을 앞둔 딸아이가 우열반으로 편성될 학교의 규칙을 염려하며 자기 방에 앉아 있다.
집안의 적막함이 공기를 휘감으며 당황하게 만든다. 오랜 시간 지켜오던 틀을 부수고 명절에 참석치 않는 오만을 누군가가 응시하는 것 같다. 현실에 역행하며 존재를 내세우는 자신이지만, 용서를 받기를 원한다.
그동안 나는 며느리의 자리를 잘 지키지 못하여 회의에 시달렸다. 어설픈 살림 솜씨는 시댁의 여러 가지 일을 보고도 용기를 앗아가게 했다.
안방에 카펫을 깔고 6인용 밥상을 펴서 책상을 만든다. 분위기를 바꿔 정신을 회전 시킨다. 책상 위에는 회색빛 카세트가 음악을 토해내고 그 곁에는 연휴를 함께 누릴 책들이 촘촘히 쌓여 있다.
며칠 전,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서 촛대를 구입 했다. 사기로 만들어진 촛대 위에는 순간도 두꺼운 양초가 온 몸을 태우며 깜박거린다. 대낮이라 실체는 희미하지만,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붉은 촛불과 푸른 촛불이 어둠을 기다리며 땀을 흘린다.
가족들이 돌아오는 시간까지 이브자리도 그냥 둘 계회이다. 무위도식하는 마음으로 별천지의 삶을 흉내 내고 싶다. 대식구를 지닌 나에겐 만져볼 수 없는 시간들이 아닌가.
숨 막히는 고요가 물밀 듯 몰려온다. 밤도 점점 깊어간다. 촛불도 혀를 날름거리며 적막을 요염하게 장식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나의 조국이라는 CD를 카세트 안에 바꿔 넣는다. 몇 차례 리바이벌하며 스메타나의 정신세계를 훔쳐본다. 가슴속에 자리한 돌덩어리를 차곡차곡 부수며 또 하나의 나를 만진다.
큰 동서 얼굴이 허공을 맴돌며 나를 바라본다. 시댁 일에 방관하는 나를 만족해하진 않지만, 간신히 용서해 준다. 대 명절인데도 외도하는 동서를 침묵으로 일관한다. 20년 이상 함께 지내온 동서 사이지만, 내면을 알기엔 아직도 먼 것일까. 가슴을 채우지 못하는 우리는 빙판처럼 외로워져야 서로를 볼 수 있을까.
인생을 선명히 느끼는 이즈음, 동서의 지나온 삶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시댁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형님 덕택에 어리광을 부리며 산 셈이다. 부모님 안 계신 집안의 큰며느리로서 꿋꿋이 버텨온 형님이다. 친척이 남보다 못할 때도 있다는데, 나와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
연휴가 자책감으로 잿빛 구름이 된다. 갈등이 심할 줄 알았으면 가족들과 무궁화호에 앉았을 텐데, 갈등 자체가 양심일 모른다며 자신을 위로해 본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창문을 활짝 연다. 밤공기는 맵지만 스메타나의 영혼이 방안을 환기시킨다.
복잡하게 전개되는 집안일을 잊으라며 새 바람을 일군다. 클래식에 익숙한 입장은 아니지만, 듣고 느끼려고 노력하며 그 곡을 음미한다. 스메타나는 체코 국민음악의 원조다.
맥주 양조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운다. 아버지가 음악가의 길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혼자 프라하로 건너가 어렵게 공부한다. 불길 같은 창작력은 50세에 청각을 잃게 하고 정신착란을 일으켜 60세에 삶을 마감한다.
그의 교향곡은 오랜 세월 남아 물이 되고 바람이 된다. 오늘 같은 날에도 빈곤한 삶에 윤활유가 된다. 스메타나의 영혼은 아우성을 치며 나의 교만과 아집을 부숴버린다. 처절한 영혼이 절정에 오르는 순간이다.
먼 옛날, 그 곡에 몰두하던 친구가 떠오른다. 음률을 섬세하게 만지던 친구가 생각난다. 아스라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보랏빛 선율과 조화를 이루며 몰다우강을 연상시킨다. 환상의 날개를 달고 강 위를 날아다닌다.
나의 조국은 스메타나가 고향인 프라하 시에 헌정한 곡이다.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체코는 독립운동을 일으켜 혁명의 정점에 달했고 스메타나도 민족운동에 참가한다.
몰다우강은 체코에서 가장 큰 강이다. ‘나의 조국, 2곡의 부분으로써 섬세하고 스릴 있는 터치로 장엄하기 그지없다. 암석에 부딪치고 햇살에 부서지면서 하폭을 넓혀간다. 몰다우강의 물골은 스메타나가 고향을 찾아가는 긴 행로였다.
수원지에서 흘러 나와 프라하 시로 사라지는 물줄기는 그에겐 정신적 고향이며 안식처였다.
형님 제가 잘 못했어요. 부산에 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어요.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죄송해요.”
음악에 취해 있던 내가 갑자기 용기를 내고 수화기를 잡는다. 동서에게 양해를 구하며 가까스로 입장을 변명한다. 담담하면서도 우울한 동서의 목소리가 가슴을 파고든다. 여운은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동서에게 전하고 나니 날듯이 후련해진다.
요즘 큰댁에는 복잡한 문제들이 많다. IMF의 후유증으로 시숙의 사업이 휘청거린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불편하다. 황소가 된 마음으로 묵묵히 길을 가다가 무거운 짐을 실어 주더라도 짊어지고 올 수 있는 각오가 필요한 것 같다.
며칠간의 자유를 기대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허울 좋은 자유가 나를 비웃으며 말없이 노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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