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아래서 / 최민자

 

나무에 대해서는 쓸 생각을 마라.

 

습작시절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양하 선생이 이미 써 버렸으니 웬만큼 써서는 안 먹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다시 나무를 쓴다. 언감생심 선생의 발치에라도 닿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무에 대한 은유가 진즉 빛을 잃었다 하여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하고 싶은, 내 안의 욕구 때문이다. 그런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이 개심사 연못가의 배롱나무였다.

 

연전, 절에 들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게 이 나무였다. 나무는 그때 부채바람에 활활 이는 숯불 아궁이처럼 환하고 붉었다. 못물에 드리운 나무그림자가 선계의 것인 양 고요하였다.

 

나무는 지금 미끈한 근육질의 알몸으로 내 눈앞에 서 있다. 꽃도 잎도, 껍질마저 벗었지만, 번설이 아닌 묵언의 기품으로 산사의 저녁풍광을 가볍게 압도한다. 살아온 세월만큼 침묵으로 말할 줄 아는 존재의 위용 앞에 나도 잠시 말을 잊는다. 해거름의 적요, 쓸쓸하다. 아니 하나도 쓸쓸하지 않다.

 

배롱나무의 벗은 몸은 매혹적이다. 누구는 상서로운 瑞氣를 발산하는 풍만한 꽃 잉걸을 찬탄하지만 나는 그의 벗은 몸매에 반한다. 꽃으로 치장하고 잎으로 가리고 열매를 매달아 아름다운 나무 중에 나신까지 귀골인 나무는 드물다.

 

몽환적인 산수유도, 낭창대는 실버들도, 황금빛 스팽글의 은행나무도 벗겨놓으면 천격인데 반해 자작나무나 배롱나무는 벗어도 귀티가 난다. 자작나무가 세상 물정 모르는 늘씬한 서양 귀부인이라면 배롱나무는 면벽 수련 틈틈이 권법을 익힌, 내공 깊고 다부진 동양의 선사다.

           

건포마찰로 단련시킨 남자의 살갗처럼 기름기 없이 빛나는 피부, , 한번 깨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 만큼 단단해 보이는 팔뚝. 쇠심줄처럼 구불거리며 허공을 껴안는 손가락들. 꽝꽝한 겨울 추위를 말없이 견디고 정물처럼 서 있는 한 겨울 배롱나무가 서사를 버린 통찰의 결구처럼 비장미마저 느끼게 한다.

 

배롱나무는 운치를 아는 나무다. 드높은 허공이라고 함부로 가지를 뻗지 않고 공간을 미학적으로 세분할 줄 안다. 연과 행을 정확히 계산하여 말을 앉히는 시인처럼 가지와 가지 사이의 여백을 회화적으로 분할한다. 꽃이 흐드러진 여름에도 질펀하다거나 농염한 느낌보다는 화려하면서 단아한 느낌이 강하다.

 

휘어지고 틀어지면서도 애써 수형을 잡아 가는 가지의 역동적인 조형성에서 돋쳐 오르는 대지의 기운을 다스려내는 나무의 웅숭깊은 내공을 읽는다. 나무는 진즉 알고 있는 것일까. 절제된 관능만이 대상을 더 깊숙이 끌어당기는 이치.

 

지나버린 시간, 기억의 편린들을 따뜻한 회상으로 길어 올리는 지, 나무가 가만히 잔가지를 흔든다. 생명의 내홍을 환희로 치환해 꽃으로 내어 달 줄 아는 나무. 늙어도 늙지 않고 늙을수록 더 아름다운 나무. 이승의 삶을 다 살아내어도 끝내 적멸에 이를 수 없다면,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돌 수도 없고 바위처럼 무심질 수도 없다면, 오래 늙은 배롱나무 아래 순한 흙 거름으로 묻혀도 좋겠다.

 

절 마당 한 귀퉁이에 밝고 환한 빛으로 서서, 갈 길 묻는 나그네의 어둠을 가만히 밝혀 주어도 좋고, 승자의 역사 속에 묻혀 패장의 무덤가를 지키며 안으로만 나이를 먹어도 괜찮겠다. 불 속에서조차 소멸되지 못할 내 안의 광기들은 캄캄한 물관을 거슬러 올라 삼복염천 석 달 열흘을 혼곤한 울음으로 타오를 것이다. 타 버린 것들만이 다시 맨몸으로 설 수 있음을 알기에, 죽어 나무가 되고 싶은 건 끝끝내 아름답고 싶어서이다. 아니면 끝끝내 살고 싶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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