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 / 김종희

 

 

 

<고인돌의 루트>를 따라 삶과 문화의 족적을 좇아가는 프로그램을 본다. 야산에 흩어진 돌의 군락을 고인돌로 밝혀내고 민족과 문화의 이동을 풀어가는 내용이다. 돌 하나에 우주를 담고, 그 속에 암호 같은 흔적을 해석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내 감성도 비늘처럼 일어선다. 이성에 의해 질서화 되지 않는 감성으로 마음이 울렁거린다. 마치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곳을 탐험하는 사람처럼, 그럴 때 내게도 어떠한 소명의식이 생기는 것 같다. 아니 대상의 형태를 자유롭게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상상으로 정신의 절대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어 좋다.

돌의 원형 속에 숨겨진 역사적 의의, 그 속에는 체험이라는 시간이 있다. 먼 옛날 주검이 묻힌 곳이 오늘 비록 폐허가 되었을지라도 그 체험 속에 존재하는 원형은 끝없이 흐르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삶에 있어서 영원성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죽음은 주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고인돌은 갑골문자를 쏟아 놓는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흔적은 회한으 장소가 아니라 상상력의 공간이다. 상상력은 단순한 돌에도 영원성이라는 생명을 불어넣는다.

학교를 오가는 산길에 돌탑이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하나씩 던져둔 돌이 만든 오름 형상의 탑이다. 처음부터 탑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 때는 돌무더기가 무덤처럼 보였다. 무덤이라는 말 때문에 일부러 먼 길을 돌아다닌 적도 있다. 그러나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돌무더기가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을 담아내면서 마침내 돌탑이 된 것이다. 돌이 영원한 것은 자연적 수명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사연 때문이다. 비록 예술적 완성도는 없을지라도 무심한 돌탑이 아름다운 것은 돌에 얽힌 전설이 기억에서 기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탑돌이를 하면서 소원을 비는 것은 아마도 그런 영원성에 대한 바람이 아닐까.

기억에서 기억으로 흐르는 영원성, 그 결과 폐허로 보였던 돌의 군락지는 역사로 환원된다. 나아가 그 속에 끝없는 심미적 만남을 추구할 때 돌은 비로소 탑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숱한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긴 세월에 이겨져 탑신에는 이끼도 앉는다. 이끼, 그것은 돌탑의 진물이다. 진물이란 외부의 어떤 것이 육화된 것이 아닌가. 그런 까닭으로 이끼는 돌탑의 언어이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이끼가 앉았다. 사람들은 이끼 같은 검버섯을 저승꽃이라고 부른다. 저승꽃이라 부를 때 검버섯은 삶의 외곽으로 밀려난 느낌을 준다. 저승꽃이란 말 속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정경들이 사라진 우울한 냄새가 배여 있다. 그것은 자꾸만 허무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나는 저승꽃을 돌탑에 앉은 이끼 같은 것이라고 주문을 걸어 본다. 이끼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시간의 퇴적위에 움 터는 생동이기 때문이다.

숱한 시간에 곰삭은 결, 대상과 육화됨으로써 감동을 주는 돌탑처럼 어머니도 이제 탑이 되었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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